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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울림 Oct 27. 2024

행복과자점 10화

주위는 온통 깜깜하고, 인적이 드문 산골길. 빛이라곤 흐릿한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전부인 이곳에서 자신이 지금 당장 대문 밖으로 달려 나가서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있을까. 머릿속에 밀려드는 최악의 시나리오 탓에 프라이팬 손잡이를 쥔 손에 한껏 힘이 들어갔다.     

“아따. 여 아가씨가 귀가 밝네잉?”     

햇볕에 탄 듯 거뭇한 피부의 중년 남자가 까맣게 얼룩진 수건으로 이마에 송골송골한 땀방울을 닦아내 목덜미에 대충 걸치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운은 순간 극도의 공포에 몰려 사고가 마비되는 것 같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운이 살짝 뒷걸음질 치자, 남자가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가려고 했다. 그때 자동차의 거친 엔진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더니 금세 가까워졌고, 이어서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끽!      

“유운!”     

다급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마당 안으로 급히 뛰어들어서는 김윤오의 모습이 보였다. 운은 순간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안도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팽팽했던 긴장이 탁 풀렸다. 다리에도 힘이 풀린 것 같았지만, 가까스로 그녀의 양발은 땅을 딛고 서 있었다.     

“하……. 살았다.”     

유운이 작게 탄식했다. 

윤오는 창고 안의 중년 남자를 발견했는지 표정이 굳었다. 어두워서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남자가 손에 든 흉기 같은 쇠붙이를 발견하곤 윤오가 재빨리 운에게로 뛰어갔다. 그리고 운의 손목을 팍 잡아당겨 자신의 등 뒤로 그녀의 몸을 숨겼다.     

“당신 뭐야.”     

운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차가운 음성이 낯설었지만, 자신을 붙잡고 있는 윤오의 손이 따뜻해서 긴장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걸 느꼈다. 한 손에 들고 있던 프라이팬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아고-. 애 떨어지것소.”     

긴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다소 태평한 음성에 윤오가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중년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말만 척척했다.     

“아가씨가 무슨 기척도 없이 살쾡이 마냥 거기 서있당가? 없는 애가 다 떨어지는 줄 알았네-.”     

창고의 희미한 불빛 사이로 비치는 남자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던 윤오가 눈을 가늘게 뜨곤 다시 입을 열었다.     

“……아저씨?”

“아따-. 이게 누구여? 너, 윤오 아니여?”     

중년 남자가 놀라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눈으로 윤오를 보며 말하자, 윤오가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저씨가 여긴 왜?”     

둘의 모습이 꼭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보였다.

지금, 이 상황은 뭘까. 운이 곱씹어 볼 새도 없이 남자가 반가운 기색을 띠고 윤오 앞으로 다가왔다. 운은 손목을 꽉 붙잡고 있던 윤오의 손에 힘이 느슨하게 풀리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맞닿았던 손의 온기가 멀어지며 겨울의 찬바람이 피부를 스쳤다.     

“나야, 자전거 가져다주러 왔제.”

“……자전거요?”

“아. 뭐랑께……. 그 처음 듣는다는 표정은…….”     

아저씨가 난처하다는 듯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것이 어떻게 된 거냐 하면…….”     

그 순간 운은 자신이 흉기로 믿어 의심치 않던 쇳덩이가 멍키 스패너였고, 그가 가리킨 곳에 낡은 자전거 한 대가 서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아부지가 동네 사람들 자전거가 영 부실해서, 다 수거해서 한꺼번에 싹 고쳐주라고 혔는디.”

“이장님이요?”

“그려. 저번에 전화로 하도 성화를 내갖고, 여기 돌아오자마자 바쁘게 고치고 다녔다는 거 아니냐.”

“……이장님이 요새 자전거 도둑이 생겼다고.”

“허? 이 양반이 또 깜빡혔나보네! 나보고 동네 자전거 거둬다가 고쳐오라고 혀서, 요새 트럭에 동네 사람들 자전거 잔뜩 싣고서 읍내 나가서 힘들게 고쳐 왔구먼!”

“왜 마을 분들한테 말도 안 하시고 그러셨어요?”

“거-. 다들 마을회관 가느라 집을 비우니께, 아부지가 마을 어르신들한테 공지한다고 해서. 그렇게만 믿고 고치려고 창고에 처박혀 있던 자전거들까지 죄다 거둬갔지-.”     

하이고. 아부지가 또 깜빡깜빡하셨구먼!

남자는 답답하다는 듯 왼쪽 가슴을 손바닥으로 팍팍 치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윤오가 어이없는 눈으로 창고 안의 자전거를 바라봤다. 문제의 자전거는 꽤 오랫동안 방치된 거치곤 휠이 깨끗해서 그런지 지금도 여전히 사용하는 줄 알고 고쳐온 듯했다. 아저씨가 태평한 목소리로 마저 덧붙였다.     

“이거는 손볼 게 좀 남아서, 여그서 잠깐 그거 좀 보고 있었다는 거 아녀.”     

하소연처럼 쏟아내는 아저씨의 통사정을 듣던 운과 윤오는 황당한 눈으로 잠시동안 서로를 응시하다가 그만 허탈하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마을 이장님의 아들이라는 철수 아저씨는 이제 할 일을 다 마쳤으니, 시원하게 막걸리나 한잔하러 가야겠다며 지체없이 이곳을 떠났다. 그리고 떠나기 전, 자전거 수리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공짜로 봉사한 거라서 수리비는 따로 받지 않는다는 말도 잊지 않고 남겼다.

아저씨가 빠르게 떠난 후 어정쩡하게 운과 윤오가 마당에 덩그러니 남아서 서 있다가, 운이 먼저 말을 걸었다.     

“근데, 왜 다시 왔어?”     

그녀의 물음에 윤오가 눈을 굴리다가 다시 차로 가서 살충제 스프레이처럼 보이는 캔을 하나 들고 걸어왔다.     

“저번에 돈벌레 나왔었잖아. 집에 있던 게 생각나서, 마침 갖다주려고 왔는데. 늦게 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

“어?”

“그 프라이팬.”     

그가 눈짓으로 운이 한 손에 들고 있는 꽤 커다란 프라이팬을 가리켰다.     

“나 오기 전에 놀라서 냅다 아저씨 쳤으면 큰일 날 뻔했잖아. 사람 하나 잡을 뻔했다.”

“아, 그렇네…….”     

윤오가 스프레이를 운에게 건네주자, 픽 웃고 운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사람 치기 전에 와줘서 고맙고-.”     

그녀가 손에 쥔 스프레이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이것도 고마워.”     

그가 운의 웃는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평소처럼 어깨를 으쓱이며 옅은 웃음기 배인 목소리로 말했다.     

“뭘, 우리 동네 친구잖아.”     

운은 윤오의 말을 듣곤, 잠시 멍한 얼굴을 하다가 이내 활짝 만개한 꽃처럼 웃었다. 그렇게 짧은 주말이 또 저물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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