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계절 인연
할머니는 왜 세잎클로버를 따?
운이는 세잎클로버가 싫어?
아니이. 그냥-. 사람들은 네잎클로버만 찾으니까!
남들이 좋아한다고, 너도 꼭 좋아할 필요는 없어.
네잎클로버는 행운, 세잎클로버는 행복을 의미하거든. 그래서 할머니는 세잎클로버가 좋단다. 행복. 그건 평범해 보이는데, 실은 그게 행운보다 중요하고 어려운 거거든. 근데 생각보다 그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초여름, 토끼풀의 초록색으로 뒤덮인 공원에서 보냈던 유년 시절의 기억이 간혹 떠올랐다.
그렇게 느릿하게 말해주던,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 젊었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만 같았다. 유독 선명한 기억들이 있다. 별것 아닌 것 같이 오가던 대화가 평생의 기억처럼 남는.
바삭. 크런키 초콜릿을 입 안에 넣고 씹자, 듣기 좋은 소리와 함께 달콤함에 기분이 좋아졌다. 할머니가 절에 다녀오시면서 꼭 사오시던 크런키 초콜릿. 절에서 초콜릿을 팔던 것도 아닌데 왜 그러셨을까. 운은 하릴없는 생각을 하며 포크를 들었다.
층층이 구슬처럼 작고 동그란 크런키 초코볼을 넣은 초콜릿 가나슈 케이크. 위에는 조각낸 크런키 초콜릿 두 조각을 올려 장식한 조각 케이크를 작은 포크로 잘라 한 입에 넣으면 부드럽게 구워낸 카카오 케이크 시트에 진한 가나슈 크림이 바삭한 식감의 크런키 볼과 어우러져 기분이 좋아졌다.
운은 포크를 내려놓고 가만히 앉아서 창가를 바라보다가 케이크 그릇 옆에 펼쳐둔 다이어리에 ‘28’이란 숫자를 써보았다. 어색했던 숫자. 그리고 지금에서야 조금 익숙해진 것 같기도 한 숫자.
그녀의 손가락이 주저하며 흰 종이 위를 서성이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28, 27, 26.
숫자가 내림차순으로 써내려져 갔다.
25, 24, 23, 22, 21…….
다 처음 받아 들었을 때는 어색했던 숫자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빠르게 숨 고를 새도 없이 지나간 기분이라고. 불현듯 생각했다.
벌써 한 해의 끝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이제야 ‘28’도 겨우 익숙해졌는데, 곧 새로운 숫자를 받아 들게 되겠지.
운은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스물한 살에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고, 또 스물다섯엔 스물하나를 돌이켜 보며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다. 이 끝나지 않는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까. 언제, 어디서야 매듭지을 수 있을까. 그리 생각해 보곤 했다.
턱을 괴고 다이어리 써놓은 ‘28’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똑똑 들려오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구지, 저녁 시간에.’
카페 영업은 이미 마감을 한 지 오래였다. 그런 의아함도 잠시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조금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유사장님, 딸기 배달왔어요-.”
“뭐야? 웬 저녁에 배달을 다 와?”
현관문을 활짝 열자, 윤오가 하얀 스티로폼 상자 두 개를 쌓아 든 채 서 있었다.
“죽겠어. 형이 인력 착취해서, 아침부터 지금까지 이거 땄어.”
“근데 왜 밤에 가져왔냐고.”
“엄청 달고 맛있길래. 조금이라도 더 싱싱할 때 먹으면 좋잖아-.”
윤오는 곧장 자기 집 부엌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들어와, 주방의 수도꼭지를 틀어 딸기 하나를 흐르는 물에 닦았다. 그리고 물기를 툭툭 대충 털어내더니, 제 옆으로 걸어온 운의 입 앞에 내밀었다.
“먹어봐. 엄청 달아.”
잠시 그 딸기를 바라보다가, 입으로 바로 받아먹는 대신 손으로 그의 손에 있던 빨간 딸기를 낚아 한 입 베어 물었다. 뭔가 불만이 있는 듯 가늘었던 운의 눈이 금세 동그랗게 변했다.
“와. 진짜네…….”
윤오가 그 모습을 보며 빙긋 웃곤 다시 입을 열었다.
“배달비 없어?”
“배달비?”
그가 반문하는 운을 쳐다보며 보란 듯이 가스 불 위에서 먹음직스럽게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끓고 있는 흰색 전골냄비를 가리켰다. 얇게 저민 소고기와 깻잎, 알 배추를 한 장씩 켜켜이 쌓아 올리고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냄비 테두리를 따라 듬성듬성 놓은 후 그 위로 숙주를 한 움큼 올려놓은 모양새가 꽃처럼 피어난 것 같은 밀푀유나베였다.
“혼자서 맛있는 거 먹으려고 했네.”
“…….”
눈치 빠른 놈. 작게 한숨을 내뱉은 운이 창가 쪽의 넓은 테이블을 향해 고갯짓했다. 윤오는 덥석 자리에 앉았고, 운은 쓰고 있던 다이어리를 덮어 한쪽에 넣어두곤 먹다 남은 케이크를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부엌의 불 앞에 서서 잠시 전골냄비를 바라보다가, 이내 불을 끄고 다 끓은 냄비를 윤오가 앉아있는 테이블 위 동그란 받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와, 나베다.”
보글보글 끓은 밀푀유나베가 후각을 자극했다. 운은 서둘러 앞 접시와 젓가락 국자 같은 식기류를 세팅하고 자리에 앉았다.
“하여튼 먹을 복은 있나 봐.”
그녀는 양을 넉넉히 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거 오랜만에 먹는다. 하여튼 유운 맛있는 거 맨날 혼자만 먹으려고.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이런 걸 했으면 좀 부르라고-.”
고작 한 사람 더 들어왔을 뿐인데, 실내가 제법 떠들썩해졌다.
“술. 뭐, 맥주나 소주 없어? 막걸리?”
“……너 진짜 바라는 거 많다.”
“페어링이 돼야지.”
운이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맥주 캔 두 개를 손에 쥐고 돌아오자, 윤오가 만족한 얼굴을 했다. 칙. 맥주 캔을 따는 소리. 곧 캔들이 서로 팅하고 맞부딪치는 소리가 이어지며 둘의 식사가 시작됐다.
둘은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고, 푹 익은 배추 조각을 참깨 소스에 찍어 먹으며 나베의 후식으로 우동 사리를 넣을 것이냐 죽을 만들어 먹을 것이냐 그런 시답잖은 토론을 벌였다.
“근데 넌 원데이 클래스 같은 건 안 해?”
“원데이 클래스?”
“응.”
운이 윤오의 말을 듣곤 전골냄비에서 국물을 국자로 떠서 자신의 그릇에 부으며 대꾸했다.
“나 누구 가르치는 건 잘 못 하는데.”
“막상 해보면 잘할 수도 있지.”
글쎄, 그런가. 그녀가 그의 말을 곱씹으며, 맥주 캔에 남아있는 마지막 모금을 들이켰다. 그리고 배추와 소고기, 숙주나물이 진하게 잘 우러난 나베 국물에 윤오가 먹고 싶어 하던 죽 대신 우동사리를 넣어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소고기와 배추 조각을 땅콩 소스에 찍어 먹는 데에 한껏 열중하고 있던 윤오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행운과자점이 아니야?”
“어?”
갑자기 이게 무슨 물음인가 싶어 운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아니, 너 이름이 운이잖아. 유운. 보통 일차원적으로 따지면 자기 이름 따서 가게 이름 짓는 거 아냐?”
“어……. 그렇게 물어보는 건 네가 처음이다.”
운은 윤오의 1차원적인 생각에 픽 웃었다. 그리고 다시 냄비 안에 걸쳐놓았던 국자를 들어 청경채와 숙주나물을 듬뿍 떠서 자신의 앞접시에 덜어놓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내 이름이 그 ‘운’의 뜻에서 따온 게 맞긴 한데…….”
“맞는데?”
윤오도 맥주 캔에 남아있던 마지막 모금을 들이켜고 되물었다. 운은 그릇에 있는 국물을 숟가락으로 한 술 떠먹고는 옛이야기라도 회상하는 사람처럼 느릿하게 말을 시작했다.
“있지. 내 이름은 할머니가 지어주셨어. 내가 막 태어났을 때, 가장 좋은 걸 이름에 담아서 주고 싶었대. 그래서, 운이라고 지으셨대.”
모든 일에 행운이 있어서, 노력하는 일에도, 노력하지 않은 일에도 운이 따라서. 내가 항상 잘살길 바라시는 마음으로.
천천히 평소처럼 평이한 어조로 길게 말을 늘어놓던 운이 잠시 말을 그치고는, 검은 눈동자를 한 번 굴리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야. 그땐 행운이 가장 중요한 줄 알고, 나한테 그런 이름을 지어줬는데. 운보다, 행복이 중요하단 걸 늦게 알았다고. 그러니까 다른 건 몰라도, 운이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가끔 생각나. 그런 것들이. 물 흐르듯 잇던 말을 뚝 그쳤다가, 다시 입술을 뗐다.
“그래서 행복과자점으로 지었어. 할머니가 나한테 주고 싶던 게, 행운이 아니라 행복 같다고 생각해서.”
“멋진 할머니를 뒀네.”
그가 가느다란 미소를 입가에 건 채 대꾸했다. 그의 말을 듣고 운이 빙긋 웃었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녀는 전골냄비의 바닥을 국자로 휘휘 저어보더니, 냄비의 손잡이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고개를 갸웃하자, 운은 한 번 더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할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오늘은 우동을 먹어야겠어.”
“…아니, 왜 말이 그렇게 되는 건데.”
윤오의 황당한 목소리에 운은 왠지 스케이트장 사건이 떠올라 통쾌하다고 생각하며 부엌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어차피 우동사리를 먼저 넣어 먹은 다음에 죽을 해먹을 생각이라 결국 둘 다 먹을 거지만, 운은 왠지 윤오를 놀려먹고 싶어졌다. 그가 그랬듯이 말이다.
“여기 난로는 언제 생겼어?”
그가 뜬금없이 새로 들여놓은 중앙의 원형 난로를 보며 물었다.
“아, 어제 중고로 구했어.”
운은 세상 뿌듯한 얼굴이었다. 깨끗하게 잘 관리했지만, 꽤나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동그란 전기난로.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윤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새 거로 사지. 내가 하나 사줘?”
“아니. 이거면 돼. 어차피 그렇게 오래 쓰지도 않을 텐데.”
그녀의 대답을 듣고 윤오의 입 안에 물음이 맴돌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창밖을 보니 시린 바람이 불어오는 듯 가느다란 나뭇가지가 힘없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추운 겨울밤이 깊어지는 중이었다.
***
“하암.”
운은 크게 하품하며 모처럼 이른 오전부터 동네 슈퍼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래도 오픈 시간 전에 우유가 떨어진 걸 알아챈 게 다행일까. 그리 생각하며 얼어붙은 발걸음을 채근했다.
들이마시는 공기는 한겨울의 찬 기운 그 자체였다. 코가 얼어붙을 것처럼 시리지만, 또 가을 아침과는 다른 꽝꽝 얼어붙은 것 같은 상쾌함이 있단 생각이 들었다.
계절마다 아침 공기가 다르다는 것. 새삼 계절마다 아침의 냄새도 다르다는 게 신기하다고 깨닫는 요즘이 좋았다. 그렇게 겨울 아침을 만끽하며 걸어오던 중, 굳게 잠긴 가게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 쉬는 날인가?”
여자가 문 앞에서 중얼거리는 사이,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운이 후다닥 뛰어갔다.
“안녕하세요-.”
“아, 사장님? 혹시 오늘 휴문데, 제가 온 건가요?”
제 또래로 보이는 단발머리 여자 단골손님이었다. 그녀는 주로 한적한 저녁 시간대, 혹은 점심시간쯤 방문하는 손님이었다. 갑자기 오픈 시간대에 찾아온 그녀가 어리둥절했으나, 운은 거두절미하고 대꾸했다.
“엇, 아니요-. 잠깐 자리 비웠는데. 그사이에 오신 거예요. 오늘 영업일 맞아요.”
운이 빙긋 웃는 얼굴로 가게 문을 열자, 단골손님이 병아리처럼 그녀의 뒤를 종종 따라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 훈훈한 실내 공기에 시렸던 코끝이 녹는 것 같았다.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 옆에 새로 생긴 트리를 발견했다.
자신의 키보다 조금 더 큰 높이의 트리가 아무런 장식도 없이 세워져 있었다. 운은 그녀의 시선이 트리에 머문 것을 눈치채곤, 가게 안의 전기난로를 켜며 말을 걸었다.
“동네 아주머니가 이제 안 쓰신다고,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하셔서 가져왔는데. 아직 못 꾸몄어요. 이번 주중에 장식할까 하는데…. 곧 있으면 크리스마스니까요.”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연말 분위기도 내고 싶고. 운이 덧붙여 말하며 텅 비어있던 가게 안에 익숙한 재즈 캐럴을 틀었다. 종소리 섞인 캐럴 특유의 느낌이 연말의 분위기를 물씬 자아내는 것 같았다.
“시간이 참 빠르네요. 벌써 연말이라니.”
그녀가 대답하며 계산대 앞에 서자 운이 빙긋 웃었다.
“그러게요.”
그리 대답하는 운의 목소릴 들으며, 단골은 무언가를 찾는 듯 카운터의 쇼케이스를 잠시 두리번거렸다.
“오늘은 스콘이에요. 오븐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진열을 못했네요.”
단골이 쇼케이스에서 디저트를 찾고 있단 사실을 먼저 알아챈 운이 말하자, 그녀가 음료 메뉴판을 보며 홍차와 아메리카노 사이에서 잠시 혼잣말로 고민하다가 결국 평소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운은 곧장 스콘을 따뜻하게 데우기 위해 미니 오븐에 넣었다. 그리고 금색 테를 두른 흰 사기그릇 위로 따뜻하게 데운 스콘을 올려놓고, 그 옆엔 냉장고에서 막 꺼내 온 유리병에서 차례로 하얀 클로티드 크림과 빨간 라즈베리 잼을 작은 스쿱으로 떠서 곁들였다.
따뜻한 스콘이 입 안에서 파사삭 가벼운 식감으로 부서지며 녹진한 클로티드 크림, 그리고 새콤달콤한 라즈베리 잼과 어우러지면. 이만한 티푸드가 없었다.
운은 서둘러 에스프레소 샷을 내리고, 얼음물을 채운 투명한 유리잔에 부었다. 그리고 밤색 나무 쟁반에 스콘과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올려 손님 앞으로 내어갔다.
“스콘에 라즈베리 잼하고 클로티드 크림을 발라 드시면 맛있을 거예요. 드시다가, 잼이나 크림 부족하시면 말씀하시고요. 그럼 맛있게 드세요-.”
운이 곁들이는 말에 단골손님은 감사하다며 평소처럼 조용히 웃었다. 운은 도로 카운터 안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침에 마시려다가 만, 윤오가 주었던 얼그레이 티백을 꺼내 들고 유리 주전자에 넣은 후 타이머를 맞춰두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을 때, 잠시 스콘을 한 입 맛본 단골의 표정이 한층 밝아진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윤오만큼이나 오래된 단골이었다. 때때로 이곳에 다이어리를 들고 와 혼자서 열심히 쓰기도 했다. 그러다 들고 온 책을 읽기도 하고, 카페 안에 있는 책꽂이를 가리키며 책을 읽어도 되냐고 묻고 가만히 자리에 앉아 두 시간 동안 책 한 권을 다 읽고 돌아가기도 했다.
운이 잠시 생각하다가, 띠띠띠 울리는 타이머 소리에 유리 주전자에 넣었던 티백을 꺼냈다. 그리고 수색이 진하게 우러난 얼그레이를 흰색 머그 두 잔에 따라서 한참 열심히 다이어리를 쓰고 있는 단골 앞으로 내어가, 머그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이건 서비스예요. 스콘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좋지만, 따뜻한 홍차도 잘 어울리거든요.”
“아…. 감사합니다-.”
손님은 스콘 한 입과 홍차 한 모금을 맛보곤 만족하는 기색이었다. 운이 그녀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살짝 훔쳐보고는 즐거운 낯빛을 띠었다.
첫 손님 주문을 끝마치고 나자, 다시 한결 여유로워진 시간.
운은 이렇게 한가로운 오전 시간대에 손님과 공유하는 시간이 좋았다. 그녀는 카운터와 가까이 위치한 테이블에 앉아 노트 하나를 펼쳐 들고 트리에 어떤 걸 채워 넣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그냥 가볍게 다이소에 가서 꾸밈 용품을 사 오는 걸로 생각을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에 얕게 쌓인 눈을 정리하기 위해 빗자루를 들고나왔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여기서 혼자 보내게 되려나.”
운이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올해는 혼자도 나쁘지 않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차분하게 비질을 시작했다.
그러다 모두가 들떠있는 연말에 혼자면 조금 심심하려나. 그런 하릴없는 생각을 번갈아 했다. 고요한 오전의 겨울 시골 풍경은 시간이 멈춘 것 같기도 했고, 오래된 풍경 사진처럼 보이기도 했다.
수북했던 단풍잎들이 무색하게 비어버린 앙상한 나뭇가지. 추위에 색이 바랜 나무의 갈색은 정적인 느낌이 들었다.
“……고요하군.”
그렇게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곤 마당 대문 앞으로 나와 그 근처를 쓸고 있는데. 저 멀리서 자동차의 엔진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멀리서 처음 보는 검은 세단이 조그만 점처럼 보이더니 소리와 함께 점점 커졌다. 그리고 가게 바로 옆의 공터에 자동차가 멈춰 섰다.
손님이 없다고 말하면 온다더니. 비슷한 맥락인가. 아무래도 가게 손님인가 싶어서 운은 공터에 세워진 자동차를 물끄러미 응시했고, 달칵 운전석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안에선 익숙한 낯이 내렸다.
대문 앞에 선 그녀가 멀리서 눈이 마주친 남자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시골에서 보기 드물게 세미 캐주얼 차림이었다. 하얀 목 티에 어두운 밤색 겨울 코트를 잘 차려입은 남자. 남자가 멀리서 시선이 마주친 운을 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곤, 어느샌가 척척 그녀의 앞까지 걸어와 평소처럼 인사했다.
“안녕, 유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