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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울림 Oct 27. 2024

행복과자점 12화

지나치게 밝은 갈색 눈동자가 유운을 응시했다.

‘이제 봄이야.’ 

‘…그러게, 난 아직도 겨울에 남아있는데.’

운은 불현듯 그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도 뜬금없다고 생각했지만, 기억의 파편처럼 떠오르는 장면에 순간 멍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한 박자 늦게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그 모습에 남자는 가볍게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운은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친숙하게 인사하는 그를 보며 미처 숨기지 못하고 얼떨떨한 미소를 띠었다.     

“어, 권재이. 그, 오랜만이긴 한데…….”     

그녀는 마치 네가 왜 여기서 나와, 하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어정쩡하게라도 웃어 보이려는 눈매와 달리 익숙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재이가 유연하게 눈을 휘었다.     

“전화는 왜 안 받았어?”     

그가 사뿐한 웃음을 섞어 묻자, 운은 제 손에 들린 색바랜 나무 빗자루를 내려다보며 답했다.     

“바빠서 그랬지. 넌 잘 지냈어?” 

“그냥 지냈어.”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운은 이 자리에 재이가 서 있는 게 어색한 듯 주위로 시선을 흩어놓으며 질문했지만, 그는 그런 운의 태도에 연연치 않는 듯 평이한 얼굴이었다.     

“그냥, 감.”

“……자리 깔았어?”     

운의 말에 그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대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운이 ‘허’하고 어이없다는 듯 입을 벌리고 서 있다가 그의 뒤를 바짝 따라왔다.     

“네가 무슨 무당도 아니고, 장난치지 말고.”     

그렇게 볼멘소리 내는 목소릴 들으며 그는 언젠가 한 번 와본 사람인 것처럼 익숙하게 가게의 문을 열고선 안으로 들어갔다.

드르륵. 현관을 지나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에 경쾌한 캐럴과 함께 조용히 다이어리를 정리하던 단골손님의 시선이 일순간 재이에게로 머물렀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카운터 옆의 테이블에 자리 잡더니 속 편하게 대꾸했다.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가 뭐 그렇게 중요해. 오랜만에 보는 친구한테 물을 게 그거밖에 없어?”     

하아. 운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급격히 피로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여전히 재이는 그녀와 다르게 편히 자리에 앉은 모습이었다.     

“그래. 장난이고, 내가 한소진한테 물어봤어.”

“그럼 그렇지.”     

한소진. 역시나 자기 친구가 출처였다. 운은 가만히 작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혼자 수긍했다. 그리고 재이에게 잠깐만 기다리라며 몸을 돌려 카운터 안으로 들어갔다.

덕분에 테이블에 홀로 남겨진 재이는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문 옆에 바로 세워놓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간 크기의 빈 트리 나무. 낡은 밤색 협탁 위로 쌓인 유리컵들과 레몬 한 조각이 들어간 유리병의 물. 그리고 따뜻한 기운이 퍼져 나오는 전기난로.

곧 자신이 앉아있는 자리에서 시선을 내리자, 유운처럼 모난 데 없이 동그란 밤색 원목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카운터 안으로 들어갔던 유운이 어느샌가 양손에 나무 쟁반을 든 채 나타났다.     

“가나슈 케이크. 너 좋아하잖아. 마침 어제 먹고 남은 게 있어서.”     

운은 그렇게 말하며 모락모락 하얀 김이 올라오는 흰색 머그잔, 그리고 조각낸 크런키 초콜릿 한 조각이 올라간 가나슈 케이크 한 조각을 차례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나 아이스 아메리카노 좋아하는데.”

“추우니까 따뜻한 거 마셔. ”     

재이가 머그잔 손잡이를 잡으며 하는 말에, 운은 심드렁한 투로 여지없이 대꾸했다. 그는 픽 웃곤, 별다른 반박 없이 앞에 놓인 가나슈 케이크를 포크로 베어 입에 넣었다. 바삭하게 씹히는 크런치 볼과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크림, 부드럽고 진한 카카오 케이크 시트가 입 안에서 한데 어우러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달콤한 맛 덕분인지 이상하게 기분이 들뜨는 것만 같았다. 바깥의 찬 공기와 대조되는 따뜻한 공간에 앉아있어서인지, 그게 아니면 유운이 제게 준 케이크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곳에 운전하면서 올 때까지만 해도 스스로 침전하듯 가라앉아 있었단 사실이 무색해져 버렸다.     

“단 거 싫어하는데, 이상하게 네 초콜릿케이크는 맛있어.”

“카카오 함량이 높은 초콜릿을 써서 그런가.”     

그녀가 한껏 진심을 담아서 하는 대꾸에 재이가 나긋하게 웃었다. 그는 조용히 포크 질로 케이크를 두어 번쯤 더 먹었을까. 곧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곤 다시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운아.”

“응.”

“왜 갑자기 여기로 왔어?”     

아무 말도 없이, 왜 그랬어. 그렇게 숨어서 묻는 듯한 재이의 말에 운은 수색 짙은 홍차가 담긴 흰색 머그잔을 만지작거렸다. 뜨거운 찻물로 데웠던 머그잔은 그새 겨울의 찬 공기에 눌러 조금 식었는지 뜨뜻미지근했다. 만지작거리던 머그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켜곤 그녀는 단조로운 투로 답해주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어.”     

그는 운의 말을 가만히 곱씹다가 다른 말을 내뱉었다.     

“머무는 공간은, 그 사람을 닮아있다고 하잖아.”     

그리고 유운이 준 커피를 다시금 한 모금 마시곤 말을 이었다.     

“여긴 널 닮았네.”

“어떤 점이 닮았는데?”

“그냥. 여기 계속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아. 그런 생각이 들어.”     

운은 문득 이 공간에 권재이가 들어앉아 있는 상황이 언젠가 한 번 있었던 장면처럼 느껴졌다. 분명 처음인데, 불현듯 상황이 낯설지 않았다. 마치 이전에 겪어본 것처럼 느껴질 때가 간혹 있었다. 운이 자신의 뜬금없는 생각을 가볍게 웃으며 떨쳐냈다.     

“왜 웃어?”

“뭔가, 네가 여기에 있는 게 이상해서. 그나저나 일은?”

“출장 나온 김에 들렀어. 이 근처였거든.”     

그가 여유롭게 대답하곤 머그잔에 가득 찬 까만 커피를 후하고 불었다. 순간 뿌연 수증기가 일었다. 운은 그런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1월생 권재이. 자신과 같은 출생 연도였지만, 빠른 연생이었고 그로 인해 학교에서는 엄연히 재이가 선배였다. 흔히들 말하던 족보 브레이커였으나, 동아리에서 다른 학년 동갑내기로 만난 재이는 운과 나름대로 좋은 대학 친구가 되었다. 성격이 잘 맞았고, 좋아하는 것들이 닮아있었다. 하지만 여느 대학교 친구들이 그러하듯, 어느 순간 가는 길은 달리했다.

그는 무슨 바람이었는지, 전역 후 곧장 CPA를 준비하더니 빠르게 합격을 거머쥐고 졸업과 동시에 회계 법인에 취업했다. 그리고 이제는 만으로 2년 차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토록 달랐다. 자신과 그가 지나온 계절이. 그리고 다른 친구들도.     

“내가 여기 와서 별로야?”

“별로일 게 뭐 있어.”

“별로 아니면, 또 올게. 또 와도 되지?”

“…여기 멀잖아.”

“안 멀어. 차로 두 시간이면 오는데, 뭐.”

“소진이랑 오던가.”     

걔도 못 본 지 오래됐다. 운이 작게 웃으며 덧붙여 하는 말에 재이가 그녀와 눈 맞추며 웃었다.     

“혼자 올 건데? 한소진 시끄러워.”     

그가 고개를 가로젓곤, 잠시 생각하는 듯 고개를 기울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음 주 토요일.” 

“어?”

“그때, 이 근처에 또 볼 일이 있어서.”      

그가 하는 말에 운이 도르륵 눈을 굴렸다. 그가 이곳까지 또 오는 건 만류하고 싶었다. 이곳까지 온 이유에는 그녀가 알던 얼굴들을 마주치기 싫어서인 이유도 있었으니까.     

“토요일 안 돼.”

“일요일은 나도 일정이 있는데.”     

회사 선배 결혼식이라, 그리 덧붙이는 말을 들으며 운은 대번에 대꾸했다.     

“그러니까, 오지 말라고.”

“토요일엔 왜 안 되는데?”

“그러니까…….”     

머릿속으로 핑계를 떠올리려고 했지만,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러다 운은 문득 어제저녁 윤오와 나베를 먹으며 나눴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원데이 클래스!”     

운이 순간 큰 소리로 그렇게 외쳤다. 그 바람에 조용히 다이어리를 정리하던 창가 자리의 단골손님도 반사적으로 큰 소리가 들린 운의 테이블을 쳐다보았고, 운은 괜스레 민망해져 큼큼 목을 가다듬는 소리를 내곤 다시 적당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날 베이킹 클래스가 있어. 그래서 안 돼.”

“여기서 클래스도 해?”     

재이는 그러기엔 공간이 작지 않나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며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운이 이에 질 새라 먼저 선수 쳐서 그럴듯한 말을 덧붙였다.     

“클래스 할 땐, 여기 카페 테이블 공간을 좀 정리하고 하지.”     

그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곧 납득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냥 오늘처럼 시간 날 때, 아무 때나 올게.”

“먼데, 굳이 뭘 또 온다고 그래.”     

그녀가 투덜거리며 하는 말에도 그는 대꾸 없이 무시했다. 그러다 그는 금속 재질의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곤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들이켰다. 어느새 마지막 모금이었다.     

“그만 가봐야겠다.”

“그래.”

“오늘은 잘 있는 거 봤으니까 됐어. 그동안 전화 안 받은 건 좀 괘씸하지만.”     

사실 전화를 받지 않은 건 어떻게 말해도, 변명에 불과했다. 전화를 피한 건 맞으니까. 그냥 모든 것과 연락 두절 상태로 지내고 싶었다. 자신은 어쩌면 지독한 회피형이었으니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은 그를 마중하기 위해 덩달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둘은 함께 가게 문을 나섰다. 차까지 가는 사이 재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유운, 너 가나슈 뜻이 뭔 줄 알아?”

“프랑스어로 바보, 멍청이 아니야?”

“그래, 네가 말해줬었지.”     

가나슈는 옛날에 과자 공장에서 일하던 견습생이 초콜릿이 끓는 그릇에 실수로 우유를 쏟아서 만들어진 거라고. 그래서 이 맛있는 게 프랑스어로 바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며 웃었다. 

꼭 세상엔 똑똑한 사람만 필요한 게 아니라고. 유운은 재이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정작 그녀는 잊어버렸지만.     

“내가 그랬었나.”

“그랬었지. 문득 생각나더라고, 그 얘기가.”

“갑자기?”

“그냥.”     

운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는 운을 보며 낮게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내가 가나슈 같다고.”     

의미를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다시금 운의 눈동자에는 의문만이 떠올랐다. 유운이 생각하기론 권재이는 그 단어랑 아주 거리가 멀었으니까.     

“유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밝은 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또 올게.”     

그 말과 함께 재이는 핸들을 돌렸고,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점점 멀어지는 검은색 세단의 후면과 동시에 눈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운이 먼저 말을 걸었다.     

“오늘은 늦었네.”

“방금 그 사람은 누구야?”     

자신이 한 말과 전혀 다른 물음이었지만 운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대학교 친구.”     

그 대답을 들은 윤오가 잠시 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가게를 향해 발걸음을 뗐다.     

“오늘 가게 많이 바빴어?”

“평소랑 비슷하지, 뭐. 근데 넌 웬일로 늦게 왔어?”     

운이 미닫이문을 열며 윤오를 돌아보자, 아침부터 서준에게 불려 갔다 왔다며 살짝 툴툴대는 투로 말했다. 그녀는 그 모습이 통쾌하다는 듯 가볍게 웃음기를 띤 채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때마침 단골손님은 이제 막 떠날 참이었는지 자리를 정리하고 쟁반 위에 다 마신 유리잔과 깨끗이 비운 그릇을 정리해 카운터로 들고 왔다.     

“저, 사장님-.”      

그녀가 내미는 쟁반을 받아 들며 평소처럼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렇게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저, 엿들으려던 건 아닌데. 아까 말소리가 좀 크게 들려서요. 혹시 다음 주 원데이 클래스 저도 신청할 수 있을까요?”     

하는, 예상치도 못한 단골손님의 물음에 운의 까만 눈동자가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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