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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울림 Oct 27. 2024

행복과자점 13화

7. 겨울비     



영업 종료 시각을 꽤 넘긴 시각. 이제는 저녁을 챙겨 먹어야 할 시간인데도 운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서 골똘한 얼굴로 노트에 글씨와 자투리 낙서를 끄적거리다가 땅이 꺼질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운의 바로 옆 테이블에서 자기 할 일에만 집중하고 있던 윤오가 쯧, 하고 짧게 혀를 찼다.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여전히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박아놓고선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그냥 지금이라도 못한다고 하던가.”     

운은 얼떨결에 클래스를 하게 된 전후 사정을 윤오에게 줄줄이 실토했고, 그는 어이없는 듯 고개만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다 계기가 뭐가 중요하겠냐며 되려 잘해보라고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려까지 해주었다. 그녀가 총기 없는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보며 기운이 모조리 빠졌는지 힘 없이 몸을 뒤로 젖혔다.     

“그럴 수 있으면 그랬겠지…….”     

운은 느리게 눈을 감고서 그 순간을 떠올렸다. 단골손님이 원데이 클래스 질문을 외치던 순간, 막 가게 안으로 들어오던 은정이 눈을 반짝이며 합세해서 묻던 그 모습을. 그때는 도저히 입 밖으로 안 된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거절 못 하는 것도 병이다. 아니라고 정확히 말했어야 했는데. 괜히 한다고 해놓고, 제대로 못 해서 다들 실망하면 어쩌지.

그런 깊은 시름에 빠져들려고 할 때.

윤오는 차가운 인상의 은테 안경을 쓴 채 무표정하게 노트북 화면에 꽂혀 있던 시선을 떼고 굳은 듯한 목을 양쪽으로 뚝뚝 소리가 나도록 꺾었다. 그리고 노트북을 탁 소리가 나도록 덮고, 피로에 찌든 인상으로 안경을 벗은 윤오가 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담담히 말했다.     

“뭐. 계기가 뭐든 일단 시작해 보는 건 괜찮잖아.”     

원래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어. 그렇게 무심히 덧붙이는 말이 지금의 운에게는 퍽 위로가 되었다. 그녀가 다시 테이블에 붙였던 뺨을 떼고 제대로 자세를 고쳐 앉아서, 노트에 크리스마스 아이싱 쿠키와 스콘, 슈크림, 슈톨렌 같은 것들에 대해 고민해 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곧 크리스마스니까 그에 어울리는 메뉴가 좋을까. 아니면 집에서도 혼자 간단히 해 먹을 수 있는 종류가 좋을까. 혼자 다시 생각의 늪에 빠진 사이 윤오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엔 그녀가 노트에 시선을 박아놓은 채 주의를 분산시킬 줄 모르고 깊게 파고들고 있었다. 그렇게 길게 늘어진 고민 사이로, 코끝을 사로잡는 얼큰한 라면 냄새가 퍼졌다.

어느샌가 부엌 안에 들어간 윤오가 냄비를 불에 올려 능숙하게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그의 모습을 쳐다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밥은 먹고 고민해야지.”     

그리고 금세 다 끓은 라면 냄비와 앞 접시, 그리고 젓가락 두 세트를 운이 앉아있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래, 자기 전에 해야 할 일도 많은데. 한국인이 밥은 챙겨 먹어야지.”     

겨울의 한밤중.

라면 냄새가 퍼진 실내 공간은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운은 일단 오늘은 평온하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침대에 눕고 나면 나른해져서 잠이 잘 올 거란 생각이 들었다.     

***     

요즘의 자신은 나름대로 바빴다. 이곳에 어떻게 오게 된 것이었는지, 그 이유를 잊어버릴 정도로 바빴다. 카페 영업이 끝난 저녁에는 여러 가지 자신이 할 줄 아는 레시피들을 응용해서, 실험 몇 개를 해보았고, 그러다 새로운 레시피를 따라 하기도 했고.

자신이 중,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을 거쳐 즐겨왔던 취미인 베이킹 시간들을 꼽아도. 요즘만큼 빈번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가끔은 빵 굽는 냄새에 질려서 만든 빵을 먹고 싶지 않을 때도 간혹 있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대부분 시간에는 이 공간에 퍼지는 빵 냄새가 좋다고 생각했다.

하루가 끝나면 다이어리를 펼쳐서 해보았던 레시피들을 정리해서 일기로 적어내는 일들이, 그리고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겨울의 시골 풍경을 구경하는 일이, 길가를 걸을 때면 어깨 너머로 보이는 채도를 잃어버린 듯 노랗게 빛바랜 논밭 위로 하얀 마시멜로가 얹어져 있는 풍경을 구경하는 일이 즐거웠다.

운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손을 바삐 움직였다. 창밖은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해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이런 날이면 착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었는데, 그랬던 시간들이 무색하게도 지금은 가게 안에서는 나름 바삐 몸을 움직여야 해서 그런지 그런 기분이 들 틈도 없었다.

곧 열두 시가 되었고, 인근 시청 직원들은 소그룹으로 방문해 뜨거운 아메리카노, 아이스 아메리카노, 오늘의 디저트를 몇 개나 테이크아웃 해 갔고. 점심의 끝자락에서는 단골손님이 왔다.

여자 단골손님의 이름은 이도영. 그녀는 이번 주말에 있을 클래스가 벌써 기대가 된다며 연신 밝게 웃는 얼굴이었다. 발랄하게 웃는 얼굴이 보기 좋아 운도 덩달아 입가에 미소가 스며들었다.

평소에 그다지 말수가 많은 손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그녀도 자신처럼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지만 한번 말을 트면 이야기가 길게 이어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테이크아웃으로 커피를 주문하곤, 준비되는 동안 카페 공간에 작게 구성된 나무 책장에서 얇은 책을 골라 훑어 내리다가 책에 껴놓은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곧이어 운이 ‘커피 나왔습니다’하고 말하자, 도영이 대답 대신 계산기 앞으로 걸어와 대뜸 이렇게 물었다.     

“사장님. 윤동주 시인 좋아하세요?”

“윤동주 시인이요?”

“책장에서 필사 해놓으신 거 봐서요. 저도 그 시 좋아하거든요.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아주 예전에 쓴 건데. 그게 왜 거기 있었지…….”     

그녀가 머쓱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운 자신은 대충 책에 끼어놨던 필사한 종이를 지금에서야 떠올렸다. 이전에 자주 곱씹던 윤동주의 길.     

“글씨가 예뻐요.”     

도영의 말에 운이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미소 짓자, 그녀가 텀블러에 가득 담긴 카페라테를 손에 들고 잘 마시겠다며 웃어 보이고는 가게를 나섰다.

운은 오랜만이었다. 그 시를 다시 떠올리게 된 건. 그녀가 텅 빈 카페 공간을 바라보다가, 카운터 앞에서 벗어나 도영이 서 있었던 작은 책장 앞에 서서 조금 전 그녀가 들고 있던 책을 집어 들었다. 이전에 접었던 흔적이 희미해진 종이.     

윤동주_길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운은 그것을 한참이나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건 자신이 2년 전 겨울에 거리에서 울면서 걸어가며 읽었던 시였다. 그날은 어렵게 필기시험에 합격한 기업의 최종 면접에서 불합격 결과가 나온 날이었는데, 그날따라 너무 하늘이 높고 맑았다. 너무 환하고 밝은 낮의 하늘이 자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 같았다.

붉어진 눈으로 버스 정류장에 서서 집에 갈 버스를 기다리는데, 옆을 돌아보니 전광판에는 검은색 글자들이 문단을 나뉘어 일목요연하게 적혀있었다.

새하얀 전광판 위로 궁서체로 적힌 윤동주의 시. 

한참이나 다른 세대를 살다 간 사람. 그도 이런 밝은 햇빛에 자신이 부끄러웠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벌써 몇 번이나 떨어진 자신이 부끄럽고, 그럼에도 도망갈 출구를 찾지 못한 나약함이 한심해서 고개를 들 수 없는데. 그래도 여전히 하루하루는 아침에서 저녁으로 바뀌어 가고, 저녁에서 아침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이 길엔 나를 위한 풀 한 포기 없는 길인데, 난 왜 걸으려고 애쓰고 있는 거지. 그땐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어떨 땐 오래된 일들이, 마치 어제 같고, 또 바로 어제 있던 일이 전생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때 필사해 놓은 시를 다시 읽자, 바로 어제처럼 선명하게 그날이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다만, 그때의 일을 회상하는 것이 지금은 그리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인 것처럼.          

윤오가 기지개를 켰다. 외주로 들어왔던 일들을 마치고, 들어온 수정 사항을 반영해 클라이언트에게 넘기고 나자 벌써 오후 4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거울을 보니 눈가에 어두운 그늘이 늘어졌지만, 시원한 아이스 핸드드립 한 잔이 마시고 싶다고 생각했다.

뻐근해진 목을 양쪽으로 꺾으며 시선을 돌리자, 창문 너머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려오고 있었다. 그 탓에 해는 먹구름 뒤에 숨어서, 낮의 하늘이 회색빛으로 어두웠다. 

비가 내리는 추운 겨울 날씨. 나가기 싫을 법도 한데, 그럼에도 집에 있는 캡슐 커피머신 말고 유운이 내려주는 핸드드립을 마시고 싶어졌다.     

“좀 귀찮은데. 가, 말아….”     

그가 비가 내려오는 창문을 바라보며 그리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이내 중대한 결심이라도 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보송한 흰 양털로 이루어진 두꺼운 플리스 집업을 챙겨서 대충 겉에 걸치며 집을 나섰다.

몇 차례 바쁜 손님들이 지나간 평화로운 공간에 윤오가 평소처럼 문을 열고 들어갔다.     

“유사장님-.”     

천연덕스러운 목소리에 운이 부엌에서 바스락 소리를 내며 무언가 하다 말고, 고개를 들어 그가 들어오는 현관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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