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아메리카노?”
윤오는 내심 자신의 이름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아니고, 저런 반응이 조금 웃겼다. 하지만 평소의 자신을 떠올려 보면 무리도 아니겠구나 싶기도 했다.
“아니, 핸드드립.”
“아이스?”
그가 당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기다려, 그렇게 말한 후 운이 하던 일을 마저 마치곤 찬장에서 원두를 꺼내 그의 평소 취향처럼 과테말라 원두를 그라인더에 쏟아붓고서 핸들을 잡고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드르륵. 뭉툭한 금속 날에 원두 알맹이가 갈려 나가는 소리가 나며 잘 볶아진 원두 냄새가 그에게 닿았다. 운이 핸드드립을 할 때면 수동 그라인더로 열심히 원두를 갈아냈는데, 그녀의 손끝에서 곱고 거칠게 갈린 원두 가루가 유독 맛있게 내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뭐 하고 있었어?”
잠자코 운의 모습을 구경하던 윤오가 물었다.
“크리스마스 준비. 이젠 정말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제대로 꾸며둬야지.”
운은 트리와 함께 받아왔던 꼬마전구들을 대충 둘러놓은 현관 옆의 트리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녹색의 트리 위로 둘러놓은 작은 전구들은 깜빡거리며 빛을 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 돌린 윤오는 그 모습에 새삼 연말이 왔구나 싶었다.
“저대로도 좋아 보이긴 하는데. 어떻게 꾸미게?”
“이따 할 건데, 너도 돕고 가든가-.”
이전보다 손이 빨라진 운이 어느새 곱게 갈아낸 원두 가루를 드리퍼에 쏟아부으며 대답했다.
“클래스 준비 때문에 바쁠 텐데. 그건 또 언제 준비했대?”
“조금씩 해뒀지.”
안 그런 것 같은데, 가만 보면 유운은 참 부지런했다. 윤오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유운은 유리컵에 각진 얼음을 듬뿍 담고서 이제 막 내린 드립 커피를 부어 내어왔다.
윤오는 한겨울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커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리고 운이 부엌 안에서 라탄바구니 하나를 들고나와 트리 옆에 내려놓고서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 바구니에서 포장된 것들을 하나씩 꺼내 드는 것을 가만히 옆에 서서 지켜보았다.
바구니 안에는 빨간색 리본으로 묶은 투명한 OPP 봉투 속 아이싱 쿠키, 아이 주먹만 한 초코볼이 각각 들어 있었다. 빨간색과 흰색 털로 만든 것 같은 모양의 털장갑 모양의 아이싱 쿠키, 흰색의 눈꽃 모양 쿠키, 산타 모자 모양 쿠키.
전부 다 유운이 밤새 달걀흰자와 슈거파우더, 레몬즙, 알록달록한 색소를 넣어 만들어 낸 아이싱으로 한땀 한땀 그려낸 것들이었다.
“이건 언제 다 만들었어?”
“어젯밤에 다 만들었지.”
그녀가 뿌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어서 윤오가 바구니에 든 눈사람 모양의 초콜릿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뭐야? 초콜릿?”
“그건 코코아 밤. 이걸 따뜻한 우유에 녹이면 달달한 핫초코가 돼.”
겉은 밀크 초콜릿인데, 안에는 작은 마시멜로들이 들어있거든. 그렇게 말하는 운의 모습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들떠 보였다.
“근데 이걸 여기에 매달려고?”
“응. 손님들이 서비스로 하나씩 골라 가면 좋을 것 같아서. 하나씩 골라 가면서 옆에 바에 놓인 메모장에 소원을 써서 매달고 가는 거야. 자기가 고른 쿠키나 코코아 밤이 있던 자리에.”
설레는 목소리로 트리를 꾸밀 계획을 말하자 윤오는 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웃고 있었다.
“애들이 좋아하겠다.”
“어른도 좋아해, 이런 거.”
운이 그렇게 대꾸하며 싱긋 웃었다.
정성껏 만든 쿠키를 투명한 비닐에 넣은 다음 부채꼴로 주름을 잡아 빨간색 리본을 묶고, 그것들로 초록색 트리를 꾸미는 일. 그리고 그걸 나누면서 웃는 것.
그것이 참으로 유운답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입매가 다시 둥글게 휘었다. 유운은 가만히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었다.
“유운, 크리스마스에 뭐 해?”
“집에 있겠지. 혼자 해리포터 볼 거 같은데.”
윤오가 쿠키를 하나 꺼내 들어 트리를 꾸미는 일을 도왔다.
“소율이네 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할 건데, 올래?”
“내가?”
트리에 쿠키를 매달다 말고, 운이 고개를 들어 동그래진 눈으로 윤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한눈에 봐도 가족들끼리 노는데 자신이 껴서 뭐 하냐는 기색이었다.
“바비큐 파티할 거거든.”
운은 갑작스레 받은 크리스마스 파티 초대에 금세 골똘한 눈을 했다가, 다시 트리에 코코아 밤을 매다는 일에 집중했다.
“좋아, 갈래.”
의외로 호쾌한 승낙에 윤오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둘은 어느새 집중해서 트리에 코코아밤과 쿠키를 매다는 일을 끝내고는 몇 개의 반짝거리는 실버볼로 장식을 추가했다. 그리고 윤오는 테이블로 돌아가 앉아, 아직 다 녹지 않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밖에 비 오는 거 봤어?”
“응, 겨울비 내리잖아.”
그렇게 말하며 운이 따뜻한 차를 가져와, 그의 앞에서 마주 앉아 왼쪽 손으로 턱을 괴고서 익숙하게 네모난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윤오는 분명 유운이 눈앞에 앉아있지만, 생각과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해 있을 때면. 가끔씩 그런 비어있는 모습을 볼 때면.
언제고 도깨비 눈처럼 흩어져서 사라질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오래 쓰지 않을 거라며 중고 난로를 안에 들이던 일만 보아도 그랬다. 어째선지 그런 별 의미 없는 일련의 행동들을 떠올릴 때면, 가슴 한편이 싸해지는 것만 같았다.
지금도 유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지붕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보고 있었다. 그날처럼.
“무슨 생각해?”
“그냥.”
오늘 눈이 내릴 줄 알았는데, 겨울비가 오길래. 그렇게 운이 중얼거리며 차를 홀짝 들이켰다.
“봄비, 여름비, 가을비, 겨울비. 계절마다 내리는 비는 참 다른 것 같다. 그런 생각.”
흰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서, 잠시 말수를 줄였다. 윤오는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창가를 바라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땐 무슨 생각 했었어?”
“그때?”
“9월쯤. 너 여기 앉아서 멍때리고 있었잖아.”
“아…….”
그녀가 어느 날을 말하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무슨 생각을 했더라.”
운은 눈동자를 굴렸다. 기억을 돌이켜 보려는 듯. 그러다 아, 하고 작게 소리를 내더니 말을 이었다.
“대학 때부터 즐겨들었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어. 새벽마다 그 라디오를 들었었는데. 참…. 세상에 고민은 나만 갖고 있는 게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사연이 많았어. 그 사연을 보냈던 사람은 잘 지내고 있을까. 괜찮아졌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럼 나도 괜찮아질 것 같으니까. 운이 뒷말을 입안으로 삼킨 채 윤오에게 말했다.
“근데.”
머그잔에 담긴 수색에 머물던 시선이 다시 멀어졌다. 창문의 유리를 툭툭 때리는 겨울비가 내리는 마당의 풍경. 현재의 풍경으로 향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마 다들 괜찮아졌을 거 같단 생각이 들어.”
“그렇구나. 그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윤오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어째선지 그게 정말 궁금했었으니까.
“클래스는 잘 준비돼 가?”
“그냥.”
이윽고 고민에 잠긴 얼굴을 한 운이 골똘한 눈으로 차를 마시다, 즐거운 눈으로 윤오를 보았다.
“갓 구운 슈는 어떨까. 나 어렸을 때 전자제품 매장에 엄마 따라서 갔는데. 그때 도깨비방망이랑 오븐 판촉 행사로 슈크림을 구워줬었거든? 거기서 갓 구운 슈를 먹었는데. 아직도 기억나.”
“그것도 좋겠네.”
이런저런 이야길 하니, 윤오는 온종일 집에 틀어박혀 코드만 수정해 대던 하루가 기분 좋게 마무리되어 가는 것 같았다. 불과 몇 개월 전 이곳에 생겨난 행복과자점이 윤오에게 주는 의미는 그러한 것이었다.
신발 바닥과 바지 밑단을 축축하게 젖어 들게 하는 겨울비가 모처럼 나쁘지 않았다. 한겨울의 운치 있는 풍경을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아직 한낮인데도, 어두컴컴한 하늘 덕분에 실내 안의 트리 위에 장식된 코코아밤과 빨강 초록 알록달록한 크리스마스 쿠키들, 꼬마전구들은 되려 환해 보였다.
“…알았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늘이 어둡고 아침부터 내린 겨울비에 매서운 추위여도, 나오고 싶었던 이유.
“뭐가?”
“아니, 혼잣말이었어.”
그냥 유운하고 커피나 한잔 마시면서 시시콜콜하게 떠들고 싶었던 것 같다. 이래서 동네 친구가 필요한 거구나. 그는 새삼 주변에 평화롭게 또래와 떠드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깨달아 가는 중이었다.
“맞아, 소율이가 삼촌이 요즘 집에 안 온다고 속상해하더라.”
“요즘 바빠서, 못 놀아줬더니. 그새 일렀네.”
윤오가 장난스럽게 받아치는 말에 운은 작게 웃었다.
“아까 왔다 갔어. 크리스마스카드도 주더라. 이거 봐-.”
자리에서 일어난 운이 소중하게 보관해 둔 듯, 종이 상자에서 종이 카드 두 개를 꺼냈다. 그리곤 연준과 소율이 정성껏 색종이를 접고 자르며 만든 크리스마스카드를 들고 와 펼쳐 보여주며 말했다.
“난 못 받았는데. 기껏 스케이트장도 데려가 주고, 놀아줬더니. 그새 마음들이 돌아섰네?”
“몰랐어? 원래 애들 마음은 갈대야.”
그 말에 운이 빙그르르 웃었다. 그러다 테이블에 놓았던 카드를 다시 회수해 상자에 담으려고 뚜껑을 열었다. 이전에 도영이 말했던 시를 필사한 종이 한 장. 그게 순간 시선을 붙잡았다. 운이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날 퉁퉁 부은 눈으로 집에 가서 씻고 침대에 들어가, 태블릿 PC로 영화 한 편을 보았었다. 그렇게 본 영화는 카모메 식당이었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나온 갓 구운 시나몬롤을 어찌나 먹고 싶었던지.
하지만 다음날 프랜차이즈 제과점에서 겨우 만난 시나몬롤은 딱딱하고, 질기고, 달았다. 영화처럼 따뜻하지 않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