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도영
운은 들이닥치는 오전의 햇빛을 피해 창가의 블라인드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창문 너머 성큼성큼 걸어오는 반가운 사람이 눈에 보였다.
“오, 프로젝터가 생겼네?”
은정이 평소처럼 활기찬 모습으로 가게 문을 열며 들어섰다.
“밖이 많이 춥죠?”
“네. 그래도 겨울이니까, 춥긴 해야죠-.”
“따뜻하게 이거 한 잔 드세요.”
운이 웃는 얼굴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보리차 한 잔을 대접했다. 은정은 목도리를 풀곤, 자리에 앉아 따뜻한 차로 목을 축였다. 그러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클래스 한다고 배치를 바꾼 거예요?”
“네, 오늘만요.”
은정이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과는 다르게 실내 홀의 원형 테이블은 한 구석에 모두 정리되어 있었고, 대신 넓고 긴 직사각형 형태의 접이식 탁자 두 개가 서로 마주 보는 모양새로 자리 잡고 있었다.
“저긴 웬 스크린이에요?”
그녀가 창문 쪽에 세워놓은 미니 스크린을 가리키며 물었다. 동시에 클래스의 마지막 인원 도영이 도착했다. 밖의 추위가 엄청난지 파란 목도리로 목에서부터 입술 부근까지 칭칭 감아놓은 모습이었다. 그녀가 운과 은정을 보며 가볍게 고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운이 환하게 인사하며 도영이 앉을 자리에 따뜻한 보리차 한 잔을 놓아주자, 도영이 별다른 말 없이도 척척 제자리를 잘 찾아서 착석했다. 운은 나란히 앉은 도영과 은정을 차례로 보더니 이제 준비가 모두 끝난 것처럼 웃었다.
셋은 가볍게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오랜만에 하는 자기소개가 어색한지 은정이 눈을 굴리며 말했지만, 곧 모두가 소개를 마치고 나니 한결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럼 이제-.”
운의 말에 동시에 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 간단하게 영화 좀 보고 시작할까요?”
그녀는 싱긋 웃으며 밝았던 전등을 끄고, 실내의 빛을 어느 정도 차단했다. 스크린에 화면이 보일 만큼 어둡게 공간을 조성한 다음 윤오에게서 빌려온 빔프로젝터를 켰다.
그리고 <카모메 식당>을 재생했다. 운을 제외한 둘은 잠시동안 눈을 깜빡거리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곧 영화를 오랜만에 본다며 반기는 기색이었다. 특히 은정은 근래 농사일로 더욱 바빠서 영화를 언제 봤는지 기억도 안 난다며 좋아했다.
운이 준비한 작은 큐브 모양의 캐러멜 러스크와 보리차를 곁들이며 둘은 차분히 영화를 감상했다. 영상은 전체적으로 평화롭고, 어떨 땐 정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일본인 여자주인공이 핀란드 헬싱키에서 식당을 열어 운영하는 내용이었는데, 주로 평화로운 일상이 담겨있었다.
스크린 속 두 여자는 집에서 가벼운 운동을 하다가, 갑자기 한 명이 ‘내일은 시나몬롤을 만들어야겠어요’하고 말하며 금세 다음날로 장면이 바뀌었다. 바뀐 장면에서는 여자가 굽는 시나몬롤이 진한 갈색빛을 띠며 먹음직스럽게 구워지고 완성되었다.
가게 유리창 너머로 지나가던 여자 손님 세 명이 들어와 커피와 시나몬롤을 먹기 시작하고, 이 모습에 다른 이들도 손님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기서 달칵 영상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난 운이 이렇게 말했다.
“오늘, 여기 나오는 시나몬롤을 같이 만들어 보려고요.”
그녀가 준비해 두었던 A4용지에 인쇄된 레시피 종이를 얇은 투명 파일에 넣은 채로 나눠주었다.
“제가 사전에 문자로 설문조사 드렸었죠. 그때 시나몬 싫어하시는 분이 없으시길래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번에 시나몬롤을 같이 만들어 보고 싶었거든요.”
“이래서 오래 걸려도 괜찮은지 물어보셨던 거구나.”
은정은 지금 상황이 즐거운 모양인지 편안하게 웃으며 말했고, 도영 또한 오랜만에 낯선 사람과 어울리는 것이 즐거웠다.
미니 스크린 위로 크리스마스 재즈 플레이리스트와 레시피를 크게 틀어놓은 운이 은정과 도영의 테이블 위로 준비했던 재료들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밀가루, 설탕, 시나몬 가루, 그리고 스테인리스 볼과 같은 베이킹 도구들을 나눠주었고, 둘은 운의 설명과 레시피 종이를 따라 재료들의 무게를 달았다.
무게를 잰 하얀 밀가루와 설탕, 이스트 같은 가루류들을 순서대로 체에 거르고 실온에 풀어둔 버터를 더해 반죽을 주물렀다. 모두 유운의 모습을 관찰하며 어설프지만 성실하게 따라 하자, 어느 정도 그럴듯하게 흰 밀가루 반죽 모양이 잡혔다. 하얀 아기 강아지의 엉덩이처럼 퐁실퐁실해 보이는 흰 반죽이 도영의 눈에는 유난히 귀여워 보였다.
“이제 냉장고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발효할 거예요. 빵이라서 발효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운은 둘과 함께 반죽했던 자리를 조금 정리해 두고, 멈춰놓았던 영화를 마저 틀었다. 셋은 순식간에 다시 영화에 몰입했다. 조용히 즐기는 영화감상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평안하고.
운이 예상했던 대로 남은 영화를 모두 보고 나서도 시간이 조금 남은 덕분에 사전에 준비한 대로 파베초콜릿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은정과 도영은 운의 설명에 따라 밀크 초콜릿을 담은 스테인리스 볼을 따뜻한 물에 담가 녹이고, 녹인 초콜릿에 생크림을 넣은 다음 여러 번 저어가며 섞고 유산지를 깔아둔 사각형 유리 용기에 부었다. 이대로 굳히면, 아주 간단하지만 부드럽고 달콤한 파베초콜릿이 완성된다.
때마침, 딱 맞춰 1차 발효가 끝난 하얀 반죽을 꺼내 밀대로 밀어 펼쳤다. 시나몬 가루와 흑설탕 가루를 듬뿍 뿌려주고선 돌돌 말아준 다음 반죽의 가운데 부분을 밀대로 살짝 눌러주고 다시 2차 발효를 시작했다.
그렇게 마지막 발효까지 30분을 남겨두고서, 파베초콜릿을 만들 때 중탕한 초콜릿이 묻은 스테인리스 볼에 우유를 붓고 따뜻하게 데웠다. 셋이 뜨거운 핫초코를 나눠 마시며, 소소하게 이야기꽃을 피우자 금세 2차 발효 시간이 끝났다.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춘 반죽 위로 하얀 우박 설탕을 예쁘게 몇 알 뿌려주고서 따뜻하게 예열해 둔 오븐에 넣었다. 시나몬롤이 달달하고 고소한 빵 냄새를 솔솔 풍기며 구워지는 동안, 어느새 다 굳은 파베초콜릿을 용기에서 꺼내 한입 크기로 반듯하게 자른 다음 코코아 가루와 말차 가루를 곱게 뿌렸다.
띵. 기다렸던 타이머 완료 소리가 들렸다. 처음의 하얀색은 온데간데없이 노릇하게 잘 구워진 빵의 진한 갈색과 달콤한 흑색의 선이 선명했다. 오븐에서 갓 구운 시나몬롤을 꺼내자, 시선이 마주친 셋은 동시에 환히 웃었다.
우유 한 컵씩, 그리고 따뜻한 커피를 각자 기호에 맞게 한잔씩 곁들여 갓 구운 시나몬롤을 시식했다.
운이 예전에 프랜차이즈 제과점에서 사 먹었던 차갑고 달고 질기기만 했던 시나몬롤과는 달랐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적당히 달달한 느낌의 시나몬 향이 좋았다.
“이렇게 영화 보고 나서, 만들어 먹으니까 더 맛있는 것 같아요.”
도영이 영화 속 장면처럼 행복한 표정으로 커피 한 모금, 시나몬롤을 맛보며 말했다.
“사실 카모메 식당, 아주 예전에 봤던 건데. 그때 저도 시나몬롤 직접 만들어 먹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사장님하고 마음이 통했나 봐요. 그렇게 웃으며 말하는 도영의 모습이 운의 눈에 담겼다. 은정도 도영처럼 빵의 결대로 찢어서 먹곤 긍정했다.
“저도 모처럼 재밌었어요. 이십 대로 돌아간 것 같고. 이런 자리가 정말 오랜만이라서요.”
“뭐 만들지 비밀로 하셔서 그런가. 행복과자점에서 어떤 클래스를 할지 더 기대됐는데. 진짜 재밌었어요.”
둘의 소감 비슷한 말들을 들은 운이 활짝 웃었다.
“사실 정식으로 클래스를 하기엔, 제가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그냥 함께 빵이나 구워서 먹는 시간을 갖고 싶었어요.”
애초에 즉흥적으로 시작된 원데이 클래스였으니까. 사실 며칠 밤은 고민으로 잠도 안 왔다.
베타테스트 같은 느낌으로 재료비만 받고 한다지만, 그래도 어쨌든 유료 클래스가 되어버렸는데. 별로면 어떡하지. 운에겐 그런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오늘이 되어서야 뿌듯하고, 정말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은정은 집에 남아있는 서준이 한창 고생하고 있을 거라며, 다 만든 시나몬롤과 초콜릿을 깔끔하게 포장해 담고 서둘러 둘에게 인사를 고했다.
그리고 남은 도영은 저녁 약속이 있는데, 집에 들르면 시간이 어중간하다며 조금 더 있다가도 되겠느냐고 묻곤 실내의 테이블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일을 도왔다.
처음처럼 가구들의 재배치를 마친 도영과 운은 편히 마주 앉아, 따뜻하게 우려낸 캐모마일을 함께 마셨다.
“오늘 영화도 재밌었고, 그 영화에 나온 빵을 주인공처럼 만들어서 나눠 먹는 것도 좋았어요. 혹시 원데이 말고, 정규로 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그건 좀 더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렇죠. 도영이 동조하며 대답을 마쳤다.
그만한 여유가 없는 게 사실이지만, 막상 해보니 나쁘지 않았다. 오랜만에 새로운 사람들과 교류하는 기분이 들어서일까.
“그나저나, 사장님은 크리스마스에 뭐 하세요?”
“별 계획이 없었는데. 동네 친구한테 크리스마스 파티를 초대받았어요.”
“혹시 그……. 맨날 노트북 앞에서 고심하고 계신 남자분이요?”
“어? 아세요?”
그 물음에 도영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어떻게 몰라요. 제가 여기 단골이긴 하지만, 그분한테는 졌다고 생각했는데.”
도영이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게, 확실히 기억을 더듬어 보니 도영이 카페에 온 날 윤오가 없었던 날은 손에 꼽았던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