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기가 싫으네요. 괜히 이상한 생각만 자꾸 들고..."
이상한 생각..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단어라는 직감이 들었다. 나에게 고혈압으로 다니는 60대 환자분이 진료실에서 한 말이다.
우리 병원은 간판은 내과이지만, 실은 잡과 이다.
나의 환자들에게 생기는 병은 내과 질환만 있는 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과를 가리지 않고 뭐라도 해드려 보려고 한다. 오늘은 아저씨 환자에게 마음의 병이 생긴 거 같았다.
내가 물었다.
"혹시 무기력하고, 좀 우울한 거 같으세요~? 특별히 스트레스 받을 일이 있거나 환경에 변화는 없으시고요?"
그가 대답했다.
"내가 요즘 혼자 살아요... 첫째 아들은 2년 전에 결혼을 시켰고, 둘째 딸은 직장 얻고, 독립하고 싶다고 나갔어요..."
그는 금세 마음의 병이 생길 만한 자신의 사정을 내게 털어놓았다. 아내분은 왜 같이 안 사는지 바로 궁금증이 생겼지만 이유가 뭐건, 그의 아픈 곳을 더 들춰내는 것 같아서 묻지 않았다.
"어휴. 힘드시겠어요. 60대가 되면 남자도 갱년기가 올 수도 있고, 우울증도 잘 오는 때예요. 우울증인지 간단히 알아보는 설문 검사를 한번 해보시지요~"
검사결과, 그는 꽤 심한 우울증이 의심되는 걸로 나왔다. 환자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 보건소로 의뢰하면 정신건강의학과 진료까지 연계되는 제도가 있어 진행을 해드리기로 했다.
"OO님, 검사 결과를 보니 지금 우울증이 있는 걸로 보이네요. 우울증의 단계 중에도 마음이 많이 힘드신 상태로 나왔어요. 혼자서는 해결할 수가 없어요. 병원도 잘 다니시고, 자제분들이랑도 연락도 하고 왕래도 자주 하시는 게 좋겠어요 "
그가 말했다.
"아들이 결혼하더니 연락을 안 하네요.. 내가 결혼할 때 생각보다 많이 못 도와줘서 그런가, 맨날 아끼라고 잔소리해서 그런가..."
아저씨 환자의 모습은 이 시대의 평범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흰머리와 검은 머리가 섞여 회색빛을 띄는 머리, 흰 셔츠에 그것과는 조금 겉도는 청바지를 입고 있는 모습.
정장과 캐주얼의 그 믹스매치는 어쩌면 직장생활과 정년퇴직 사이에 놓여 있는 그의 처지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들에게 아무리 해줬어도 부족하진 않았을까 소심해진 마음.
하지만 아들을 다그치던 가부장적 모습을 버리기 어색해 차마 아들에게 먼저 연락도 못하는 모습.
그래서 보고 싶은 아들의 연락만 하염없이 기다리는 모습.
그래서인지 그분이 내게 힘든 걸 얘기할 때 내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우울증 같은 건 어울리지 않아서였을까.
그렇다면 그가 나에게 토로한 우울감은 마음속에서 묵히고 묵힌, 진한 농도의 외로움이었으리라.
그렇게 아버지란 존재는 표현에 서투른 사람들이었다.
나의 아버지도 살가운 표현에는 익숙지 않은 분이셨다. 가족을 위해 일하시는 인내와 희생을 아버지의 모습에서 많이 느꼈지만, 그것을 표현으로 드러내지 않으셨다.
그래서인지 돌이켜보면 나의 어릴 적 노력의 동기엔 아버지에 대한 인정욕구가 있었다.
'아들! 너가 자랑스럽다!' 이 한마디를 아버지에게 듣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40대가 된 아직까지 속 시원하게 그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나는 아들이 생기고 나서 알았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가장 큰 살아갈 이유란 걸.
그래서 그 존재를 온전히 지키려는 마음은 달콤한 표현 보단 부양이란 행동으로 먼저 표출되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묵묵히 계속 이어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어서, 다정함이 때론 사치로 여겨질 때도 있음을.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속엔 어떤 순간이건 아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울증이 생긴 나의 아저씨 환자에겐, 그가 기다리는 아들의 연락 한통이 꼭 필요해 보였다.
별거 아닐 그 몇 분의 소통은 아버지의 마음을 그 어떤 것보다 따뜻하게 할 거라 생각했다. 아들의 전화 한 통이 온다면, 그는 여전히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겠지만, 아들은 보지 못할 미소를 마음속에 머금을 것이다.
'부모님께 연락 안 하는 아들'이라..
마음 한구석에서 본능적인 찔림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 제발 저림은 곧 내가 그렇단 말이 아닌가.
휴대폰을 열어 마지막에 아버지와 통화한 게 언젠가 보았다. 음.. 한 달 전이군..
그치만 카톡은 아버지께 종종 보냈으니, 내용을 한번 봐볼까?... 대화 내용이 거의 용건만 담긴 거래처 카톡창과 다를 바 없다..
이 시대의 아버지들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나의 아버지를 챙겨야 할 때였다. 나에게 보여주시는 그런 쿨한 아버지의 모습이 다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요새 살이 부쩍 빠지셨다. 아버지에게 연락해서 이번 주말에 고기를 사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실 바닥에서 미니카를 굴리고 있는 나의 6살 아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들아... 넌 나 같은 아들이 되면 안 된다...!!! ㅜ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