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세를 바라보는 할아버지 환자,
그는 목에 생기는 암인 인두암 치료를 했던 기초생활수급자이다.
그는 대학병원에서 항암 치료를 하던 중 체력이 버티기 어려워 중도 포기한 상태로 나에게 왔었다.
내가 다른 병원에 치료 의뢰를 해드렸고,
추가 치료를 통해 목에 있던 암이 거의 안보일만큼 작아져 치료가 잘 돼 가던 상태였다.
그는 어느 정도 호전이 되자 대학병원까지 힘들게 갈 필요 있겠냐며 다시 치료를 중단했었고, 감기나 만성질환 진료를 위해 우리 병원에 왔었다.
어느 날 그는 왼쪽 가슴이 아프다며 나를 다시 찾아왔다.
" 숨 쉴 때마다 왼쪽 가슴이 아파 너무 힘드네... 원장. 집에서 여기까지... 오는데도... 휴... 몇 번을 쉬었는지 몰라."
그는 광대뼈가 튀어나올 만큼 살이 많이 빠져있었다. 노란빛을 띠는 그의 피부색은 뭔가 문제가 생겼으리란 나의 직감을 자극했다.
"몸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엑스레이를 한번 찍어보시죠 어르신."
그의 좌측 폐에는 의사가 아닌 사람이 보아도 알 수 있을만한 큰 혹과 그 외에도 여러 개의 작은 혹들이 자라나 있었다.
이전에 치료가 중단됐던 인두암의 폐전이가 틀림없었다.
"어르신, 아프신 부위의 폐에 큰 혹이 생겼습니다. 정확한 건 CT를 찍어봐야 알 수 있긴 한데... 아마도 어르신 목에 있던 암이 전이된 걸 수도 있어요.."
짧은 순간 그의 눈빛은 초점을 잃었다.
그는 처음 암이 진단된 지 수년이 지나기도 했고,
스스로 치료를 중단하기도 했었다.
그래서인지 나의 무의식 속에서 암에 대한 설명의 무게가 꽤나 가벼워져있던 모양이다.
그 무겁지 않은 암진단의 한마디에 순간의 자책감이 들었다.
" 요새는 의술이 좋아져서 암도 완치가 된다던데.. 이 것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나..?"
이전에 암 치료를 스스로 중단했던 사람이라는 나의 편견 때문인지,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나에게 희망적인 얘기를 듣길 원하는 것 같았다.
그 의외라는 감정은 그의 나이, 처지, 행색 같은 걸로 그의 삶의 무게를 가볍게 측정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씁쓸했다.
"... 음... 어르신. 암이 전이된 거라면 사실 말기암인 상태입니다. 혹시 가족이나 자식이나 같이 사시는 분은 없으세요..?"
"나는 지금 혼자 살지.. 자식은 부산에 있는데 내가 뭐.. 빚지고 한 게 있어서 연락 안 한 지 20년 됐어.. 자식이랑 같이 살면 나를 기초생활 수급자로 올려주지도 않지.."
나에게 의학적으로 그에게 도움이 될 행위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음을 느낀 후, 개인적인 생각을 그에게 얘기했다.
"제가 대학병원에 다시 연락을 최대한 빨리 취해드려 볼게요.. 그리고 어르신도 만약 말기암이 상태로 확인이 된다면 앞으로 해보실 것들도 생각해 보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그동안 하고 싶은데 못한 것들이라든지. 자식이나 의미 있는 사람에게 못 해본 연락을 해보신다든지..."
의미 있는 사람..
그에게 현재 의미 있는 사람은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철저히 고독해 보이고, 고통스러워 보이고, 표정을 잃은 그였다. 병원 근처에 사는 그는 병원에 오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상태인데.. 그가 그나마 가장 자주 보는 사람은 내가 아닐까. 그렇다면 그에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 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의미를 지닌 사람이란 누구일까.
40대 중반, 개원한 동네 내과의사인 나는 갈수록 인간관계가 좁아짐을 느낀다.
친했던 친구와의 관계도, 왜인지도 모르게 꼬인 실타래 한가닥이 시간이 지나고 커지며 서먹함으로 다가온다. 사적인 새로운 인간관계는 전무하다.
가정에 충실해지고, 의미 없는 단편적인 관계는 애써 맺지 않는다. 철저히 혼자만인 시간을 확보하려 하고, 그 시간이 진짜 나를 만드는 시간임을 느낀다.
내 또래 주위 동료들도 지금은 그럴 때라는 듯, 사람 사는 게 다르지 않다는 듯, 카톡 단체창에 새 글이 올라온 지도 한참됐다.
애써 친구, 동기, 동창이라는 이름을 붙여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해야만 하는 관계보다, 내가 지금 자주 만나는 내 환자들, 매일 보는 나를 어려워하는 간호사, 병원 청소아주머니. 매달 보는 미용실 선생님..
그들이 현재 나의 인생에 진짜 친구가 아닐까.
"어르신, 대학병원 진료 보시고,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담 없이 오세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최대한 해드리겠습니다.."
고독한 그의 얼굴, 돌이켜 보면 그는 항상 표정이 없었다.
그에게 인생을 돌이켜 느끼는 후회조차 같이 얘기할 사람이 없다면 너무 슬플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인간은 홀로는 그 의미를 지닐 수 없는 것이었다.
친구가 내 인생에 의미 있는 사람을 말한다면, 그건 굳이 나와 학연, 지연이 겹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내 삶 주위에서 서로의 존재에 의미를 지니게 해주는 사람, 자주 보며 인사 한마디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친구일 것이다.
많이 남지는 않았을 그의 인생에, 내가 서른 살 어린 친구가 잠깐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음 그가 온다면 늘 하던 청진을 한 후, 용기 내어 그의 앙상한 손을 한번 잡아드리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