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고깃국 먹자 찾아온 진통

by 구름마중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을 잘다면서 사회생활의 단맛과 쓴맛의 중간 어디쯤에서 나는 일을 그만두고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은 새로운 출발의 전환점이 되었다.


평소 즐겨 다니던 온천, 일층 로비에 한식당 홀써빙 아르바이트 구함을 봤다. 1초의 망설임 없이 목욕가방을 든 채 면접을 봤다. 시골 온천에서 사람 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고 촌스럽지만 성실해 보이는 나의 인상이 마음에 들었는지 내일당장 출근해도 좋다는 사장님.


홀써빙은 나에게 신선했다. 향기롭게 손님은 맞이하고 준비된 음식을 대접하고 부족한 것을 살펴 다 먹고 일어서는 손님에게 인사한다. 수만 가지의 색깔의 사람을 만나고 지나치고 보람도 되지만 상처되는 순간도 있지만 그것은 잠시 스치는 사람들이었고 하루하루가 리셋이었다. 손발이 고생을 했지만 정신은 유쾌한 했다. 그곳에서 나는 지금의 나의 반쪽을 만나게 되었다. 우연과 운명적으로.


"원숭이 가을생이면 너는 먹을 복이 타고났어!" 엄마는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생각하고 맞춰보면 풍요로운 가을은 신랑과 시어머니 그리고 엄마였다.


엄마는 왜소했던 아빠와는 다른 넓적한 남자와 결혼하라고 나에게 주문을 걸었다. 일부러 그런 사람을 찾은 건 아니었지만 한 덩치하고 성격이며 외모도 넓적한 남자와 결혼했고 첫 째를 임신했다. 배가 점점 불러왔지만 막달까지 일을 했다. 첫 아이여서 그런지 출산예정일보다 일주일 늦어졌다. 하루하루 더 늘어나면서 조금만 배가 아파도 이게 진통인가 양수가 터진 건가 알 수 없는 불안으로 기다렸다. 양수가 언제 터질지 몰라 병원 갈 가방은 늘 현관 앞에 대기 중이었다.


“얘야 엄마가 너 좋아하는 돼지고깃국 끓였어. 이거 먹고 힘나게 저녁에 인서방이랑 건너와”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퇴근한 신랑과 엄마집에 들렀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돼지고깃국 냄새가 반겼다. 입맛이 돌았다.

결혼 전 엄마는 장날만 되면 돼지고기를 꼭 사 왔다. 그때는 고기하면 구이용은 없는 줄 알았다. 묵힌 김치와 새우젓을 넣고 자글자글 끓여 물을 붓고 양은 냄비 가득 끓였다. 며칠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더 좋았던 건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부엌에 국 끓여 놨어, 할아버지랑 챙겨서 먹어” 엄마는 이른 아침부터 일을 가며 말했다. 냄비를 열어보면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파 향, 김치와 어우러진 돼지고깃국을 보며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줬다. 다 먹은 냄비옆에 붙은 김치 한가닥과 국물 속에 감춰진 고기 한 조각이라도 발견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때 맛이 났다.


그날 밤 9시, 배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다. 많이 먹어서 그런가 하고 옆으로 누워도 봤지만 더 불편했고 소화를 시켜볼까 하고 움직였다. 서 있지도 못할 만큼 아랫배로 아픔이 왔다. 아픔은 자동으로 몸을 굽히게 만들었고 허리가 끊어질 듯했다.


‘아! 이게 진통이구나’ 처음 느껴보는 진통이라 이제 얼마만큼 내가 견뎌야 하는지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맞아 아기가 돌면서 머리가 아래로 가야 한다고 했어 2분~3분 간격으로 아프면 병원으로 오라고 했으니깐’ 하며 진통이 없을 때 시계를 가져다 침대에 올려놓고 오빠에게는 거실에서 대기해 달라고 하며 한 시간 간격, 30분 간격, 점점 좁혀져 가는 시간을 체크하며 아픔을 참고 있었다.


잠시 진통이 없는 틈에 거실에서 신음소리가 났다. 나는 생각했다. 우리 신랑도 나의 고통을 같이 해주는구나 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진통의 강도가 점점 강해졌다. 내가 어떻게 움직이든 움직이지 않든 아기가 돌 때마다의 강렬한 진통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고 어금니를 꽉 물고 신음했다. 이것은 오롯이 나와의 싸움이었다. 새벽 5시가 될 때까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진통을 견뎠다.


드디어 3분 간격으로 아팠다. 급하게 병원으로 전화를 해보니 바로 오라고 했다. “오빠 병원 가야 할 것 같아” 서둘러 현관 앞에 놓여있던 가방을 들고 차를 탔다. 안개가 자욱했다. 평소 자주 다녔던 읍내 가는 길이였지만 방지턱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방지턱을 넘을 때는 배가 두배로 아팠다.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 잡고 한 손으로는 배를 받치며 방지턱을 지날 때마다 엉덩이를 들어 올려 힘을 덜 받게 하면서 “오빠 천천히가”하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를 쳤다.


유난히 많았던 그날의 방지턱 길을 달려 9시간의 진통을 참고 새벽 6시 자연분만으로 그토록 보고 싶었던 첫 아이를 낳았다. 사람들은 아기 낳을 때 친정엄마가 생각난다고들 하는데 나는 엄마보다 그날의 돼지고깃국이 생각났다. 그것은 엄마가 나에게 줄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 아닌가 싶다.


이틀 뒤 아기를 안고 퇴원하는 날 “안방에서 나 혼자서 진통할 때 오빠도 같이 진통했어?” 신랑에게 물었다. 신랑은 당황한 표정으로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예능 ‘개그콘서트’를 보는데 그날따라 왜 그렇게 웃기는지 이불을 물고 아픈 배를 움켜쥐며 웃음을 참느라 눈물까지 흘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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