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름마중 Oct 06. 2024

아랫목은 뜨근뜨근 입안은 시원했던 겨울밤 무수 한조각

엄마의 고단함을 날려주었던 땅속 겨울 무수

“가위 바위 보” 

느긋한 동갑내기 사촌이 술래다. 나는 멀리까지 가서 숨을 자신이 있었다. 동갑내기 사촌은 우리집 대문 옆 회색 담벼락에 팔을 기댄 채 수를 세기 시작했다. 나는 히죽히죽 웃으며 윤희 할머니네 은행나무까지 재빠르게 뛰어갔다. 집처럼 쌓아둔 지푸라기 덤불 속에 몸을 바싹 기대고 숨을 고르는 찰나였다. 들키지 않을 자신감과 아늑함도 잠시, 현우 할머니네 굴뚝 뒤에 숨어 있던 작은언니가 나를 따라왔다. “야 옆으로 가봐, 같이 숨자.” 나는 작은언니에게 다른 곳으로 가라고 손짓했지만 이미 술래가 소리쳤다. 

“찾는다” 

어쩔 수 없었다. 머리카락이라도 보일라 고개를 가랑이 사이에 파묻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흙 냄새와 지푸라기 냄새를 들이마시며 요동치던 심장을 진정시켰다.    

지푸라기 덤불속은 이불속처럼 포근했다. 눈을 감은 건지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깜깜해서 우주 어디쯤 떠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술래 상황을 알기 위해서는 나의 온 감각을 귀로 이동시켰다.      

“찾았다!” 

멀찍이 사촌 언니와 동생이 술래에게 들킨 것 같다. 나는 가랑이 사이로 코를 훌쩍거리며 숨죽여 웃었다. 오빠와 사촌 동생은 아직 들키지 않은 것 같다. 숨바꼭질의 승자는 늘 오빠와 사촌 동생이었다. 이번에야 말로 술래 몰래 담을 쳐서 “야도”를 외칠 작정이였다. 야도를 외치면 다음 술래를 하지 않고 숨을 수 있다. 그리고 여기는 더 이상 숨을 장소가 아니다. 작은언니에게 노출된 곳이기 때문에 다음 장소도 미리 물색 해야 했다. 그러는 동안 사촌 동생도 들켰다. 이제 내가 나갈 차례다. 상황을 보고 뛰어 나가야하는 순간을 기다리며 슬금슬금 몸을 움직이는 순간.     

“밥 먹어”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이미 들킨 동생은 대문안으로 들어가고 동갑내기 사촌도 사촌 언니를 데리고 집으로 가자는 신호를 보내며 “못찾겠다”하며 허무하게 놀이가 끝나 버렸다.       

대문에 들어서니 안방 작은 유리창 두 개에서 빛이 번쩍번쩍 비췄다. 부엌에서 숭늉 냄비를 들고 가는 엄마를 따라 들어갔다. 안방 텔레비전 앞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가 밥을 먹고 있었다. 오빠는 아빠 옆에 앉았고 옆에 작은 양은상에는 엄마와 우리 자매들이 자리를 잡았다. 방금 끓인 동태찌개에 양은상은 따끈했다. 그리고 동태눈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숟가락으로 괜히 동태머리를 툭 쳐 봤다. 엄마는 통태머리를 엄마 그릇에 담고 몸통은 우리에게 줬다. 엄마는 동태머리와 꼬리를 좋아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토방에 물 뿌리는 소리가 났다. 설거지를 끝내고 엄마는 또 다시 분주하다. 아궁이속 불씨를 살려 대형 빨간 대야에 물을 채우는 소리가 불길하다. 일주일 동안 묵은 때를 예고 없이 미는 날이다. “J수야”하고 오빠가 불려 나가고 “Y수야”하고 작은 언니가 불려나갔다. 동생과 나는 같은 순번이다. 민기적거리다 억지로 불려 나가는 나는 빨간 대야에 발을 조심스럽게 넣는다. “앗 뜨거” 엄마는 찬물을 더 붓고 솥뚜껑을 열어 적당한 온도를 맞춰주었다. 배꼽까지 잠기는 몸은 따뜻했고 찬바람이 맞닿는 상체와 턱은 추위에 떨린건지 엄마 때 타올 때문이지 덜덜거린다. 엄마는 허리를 한번 쭈욱 펴고 이마에 땀을 닦아낸다. 내 등에 따듯한 물을 부어주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동생이 때를 불리는 동안 나는 먼저 때를 민다. 때 타올과 엄마 힘이 더해져 등짝이 벗겨질 것 같다. “엄마 아파 아하하하” 엄살을 부리며 몸을 비틀지만 엄마는 “아이고 가만히 좀 있어”하며 국직한 국수 가닥을 마구 마구 밀어낸다. 머리에 수건을 말고 부뚜막에서 내복을 입는다. 부엌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기분도 상쾌하고 겨울 찬바람이 개운하다.

깊어가는 밤, 물 퍼내는 소리가 연신 들린다. 빨간 대야를 정리하고 늦은 밤 부엌문이 후련하게 ‘삐걱’ 닫혔다. 연탄 뚜껑 열고 닫히는 소리가 두 번 나더니 건너방 문이 열린다. 엄마의 하루가 끝이 났다. 개운한 몸으로 이불속에 누워있던 나는 엄마에게 아랫목을 내주었다. 


동지가 지났지만 초저녁부터 깜깜했다. 대청마루에 걸려있는 괘종시계가 ‘땡땡땡’ 울렸다 9시다.

엄마는 “M수아빠 무수 좀 꺼내와봐유!”

아빠는 군말없이 이불 밖으로 나와 문 앞에 걸려있는 후레쉬를 들고 바가지를 찾는다. 나는 아빠를 뒤 따라 갔다. 잠궜던 대문을 ‘끼이익 끽’ 열고 후레쉬 빛을 따라 몇 걸음 걸어 나갔다. 삼중보온 내복이지만 때도 한겹 밀어냈으니 더 추운 것처럼 옆구리까지 파고드는 찬 공기는 쓰레빠 끝으로 튀어나온 발가락도 오그라들게 했다.      

한밤중 작은 무덤 앞에 선 아빠는 내게 후레쉬를 건네주고 차가운 땅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작은 무덤은 지난 가을 수확한 무와 배추를 땅을 파서 저장해 둔 곳이다. 아빠가 보온덮개와 지푸라기를 들춰 내고 구멍에 손을 넣을 수 있도록 나는 후레쉬를 잘 비춰야 했다. 아빠 고개는 하늘을 향해 계속 더듬거린다. 후레쉬 빛이 아빠 얼굴에 비춰지니 두 눈을 찡긋 감는다. 아빠 눈이 편하게 후레쉬 각도를 바꾼다. 그게 뒤따라간 나의 임무다. 더듬거림 끝에 얼지 않고 단단한 무를 골라 바가지에 담았다. 아빠가 다시 무 무덤을 덮을 때까지 내 임무를 다하고 아빠가 일어나는 순간 후다닥 뛰어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불속에서 몸을 녹인다. “아우 시원해” 아빠가 깎아준 무를 먹은 엄마는 표정이 시원하다. 나는 이불 밖으로 손만 쭉 뻗는다. 무를 받아 한입 먹으니 아랫목은 뜨근뜨근 입안은 시원하고 아삭한 무수맛이 한가득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