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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명찬 Apr 23. 2024

숙취의 하루

휴일은 그렇게 삭제되었다

어제는 새벽에 들어와 일어나 보니 오전 11시였다.

숙취가 심했다. 적당히 마셨어야 했는데 또 선을 넘어버렸다. 술자리를 함께 한 아내도 컨디션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쉬는 날이라 부담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의 친구, 우리의 막내 토비의 송별회였다. 토비는 내일 아침 비행기로 8년 간의 한국 생활을 마치고 대만으로 돌아간다. 이 십대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보낸 토비는 작년에 학교를 졸업했고 올해 본국으로 돌아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 부부에겐 막내 동생 같은 친구라 계속 마음이 쓰인다. 토비와 본격적으로 친해진 건 2년이 채 안된다. 그래도 2년 동안 여행도 많이 다니고 술도 자주 마셨다. 함께 자지러지게 웃었고 테이블 티슈가 모자를 정도로 울기도 했다. 토비의 가족 그리고 대만 친구들은 한국에 오면 늘 가게에 들렀다. 그래서 대만 친구들과도 자주 어울릴 수 있었다. 김치찌개를 배우고 싶다는 토비의 엄마와는 김치찌개 맛집에서 밥을 먹고 장을 보고 김치찌개를 함께 끓여보기도 했다. 대만 사람에게 김치찌개의 맛을 알려준다는 게 나에게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토비에게 그녀의 이름을 각인한 볼펜을 선물했다. 요즘 시대에 볼펜을 얼마나 쓰겠냐만은 새로운 시작을 하는 토비를 위해 상징이 되는 무엇인가를 선물해주고 싶었다.


해장이 필요했다. 뭐라도 먹어야 했기에 냉장고를 열었다. 아내는 미리 불려놓은 누룽지를 먹자고 했는데 나는 더 자극적인 게 필요했다. 짜파게티와 불닭볶음면을 함께 끓였다. 이 조합은 처음이었는데 단 맛도 매운맛도 필요했던 나에겐 괜찮았다. 평소보다 물을 많이 버려 퍽퍽하긴 했지만 무말랭이 무침과 함께 맛있게 먹었다. 쉬는 날은 오후 12시가 가까워지면 맘에 불안해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후 2시가 되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제는 달랐다. 밖에 나갈 의지조차 없었다.


설거지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배가 불러 속이 쓰렸던 건 괜찮아졌는데 머리가 조금씩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2차 숙취가 시작됐다. 술을 많이 마신 건 아니었는다. 헤어지기가 아쉬워서 마지막에 마셨던 맥주가 문제였다. 다시 한번 다짐한다. 주종 교체 금지! 마지막 맥주 금지!


잠깐 눈만 붙이고 일어나려고 했는데 시계를 확인하니 오후 5시. 휴일이 그렇게 허무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내와 내가 똑같이 숙취가 있다는 것. 둘 중에 한 사람만 컨디션이 좋지 않다면 휴일에 누워만 있는 게 미안했을 텐데 우린 같은 타이밍에 속이 쓰리고 머리가 아프고 졸리고 일어났다. 상대방에게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낼 수 없는, 거울치료가 가능한 상태였다.


웃음이 났다. 조갈도 났다. 냉장고에 있는 시원한 물을 나눠 마시며 아내와 얘기했다.


-이게 뭐냐고.


-잊지 말자. 오늘을.


갑자기 속이 쓰려왔다. 3차 숙취다.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는데 뭘 먹어야 좋을지 몰랐다.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게 좋을지도.... 주방에 가서 먹을 게 있을지 찾았다. 몸이 뭐라도 먹으라고 하는 것 같았다. 아내가 잘 정리해 둔 팬트리에서 레트로트 양송이 수프를 발견했다.

훌훌 마시기엔 너무 되직하다 싶어 우유를 넣고 중불로 데워 후추만 뿌렸다. 수프 접시에 담아 안방에서 TV를 보고 있는 아내 곁으로 갔다. 아내는 침대 근처로 음식을 가져오는 걸 싫어한다. 하지만 어제는 달랐다. 납작한 수프접시에 함께 담겨 있던 깊숙한 수프 스푼을 이용해 두세 번 연거푸 수프를 떠먹었다. 누가 보면 순댓국이라도 먹는 줄 알았을 것.

수프 한 접시를 나눠 먹고 나니 불편했던 속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았다. 그리고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드디어 기나긴 숙취가 끝나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TV에서 햄버거가 나오면 햄버거가, 피자가 나오면 피자가 먹고 싶었다. 배달해 먹으려다가 이렇게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건 너무 한심한 것 같아 산책 삼아 나가서 밥을 먹기로 했다.

몇 가지 메뉴를 생각하다가 아파트 정문 앞에 있는 삼겹살집으로 갔다. 걸어가기에 집에서 먼 곳은 제외하다 보니 결국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갔다. (근데 우리 산책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


삼겹살 2인분에 맥주 한 병을 시켰다. 삼겹살 집에서는 적어도 술은 한 병 마셔야 미안하지 않는 기분이다. 반찬이 깔리자 맥주를 한 잔씩 따랐다.


-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체크해 보자.


아내와 난 건배를 하고 맥주를 한 모금씩 들이켰다. 시원했다. 아직 100%는 아니지만 속이 많이 좋아졌다는 증거다. 아내도 나와 같은 기분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맥주. 왜 이렇게 시원한 건데? 대박이네.


상추에 잘 익은 삼겹살을 넣고 콩나물과 파채를 잔뜩 넣은 후 마늘까지 넣고 한 입 가득 넣은 아내가 조금 힘겹게 씹으며 이어 말했다.


-이거라고. 이렇게 야채를 잔뜩 씹고 싶었다고.


그리고 맥주 한잔.


다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맥주 한 병으로 식사를 끝냈다. 적어도 내 기억에 고깃집에 가서 맥주 한 병만 마시고 나온 건 처음이었다. 계산을 마치고 영수증을 체크하며 밖으로 나오던 아내가 진심인지 나를 떠보는 말인지 모를 말을 건넸다.


-어떻게? 집에 가서 맥주 한잔?


-미첬나봐!!! 진심이야?


-어이구. 그냥 어떻게 나오나 한번 봤어. 예전엔 뭐든 같이 해주드만.


-선생님. 저 좀 살려주세요.


그대로 집으로 가기엔 양심에 찔려 집으로 가는 길은 조금 돌아 걸었다. 둘이서 2인분 밖에 먹지 않았는데 배가 너무 불렀다. 배가 불편해서 그런지 숙취는 확실히 없어진 것 같았다.


4월의 밤바람이 참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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