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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명찬 May 01. 2024

여행하기 가장 편한 친구

우리는 이래도 저래도 잘 맞는다


아내와 캠핑을 다녀왔다. 단 둘이 캠핑은 오랜만이었다. 아버지의 사고 이후 맘의 여유가 없었다. 정확히 1년 전이었다. 가게를 가고 있는데 아버지가 대낮부터 술에 취해서 전화가 왔고 나는 빨리 집에 들어가라고 신경질적으로 얘기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2시간 후, 119에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를 병원으로 이송하고 있다고....


1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환자란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제는 일상이 돼버린 느낌이다. 딱, 1년 만에 모든 게 바뀌었다. 가족 중에 누군가가 갑자기 아프면 모든 일상이 무너진다. 그리고 일상을 되찾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제는 우리도 죄책감 없이 바람을 쐬고 다닐 수 있다.

아침에 차를 타고 출발하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얼마만이지? 이게 뭐라고 못하고 있었지?' 나에게 되묻다가 혼자 조금 울컥했다. 아내도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차에서 '빛과 소금'의 음악이 흘러나오자 '힝'소리를 내며 얘기했다.


-뭐야. 나 왜 눈물 나?


월요일 11시.

도로가 원활했다. 영등포에서 남양주까지 1시간 만에 도착했다. 캠핑장이 있는 축령산과 가장 가까운 맥도널드 매장에 들렀다. 점심은 햄버거를 싸서 캠핑장에 도착해 맥주랑 먹기로 했다. 캠핑 시작으로 아주 좋은 계획이다. 우린 캠핑장을 갈 때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가지 않는다. 캠핑할 때 먹을 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면 버릴수록 시간이 많아진다.

키오스크에 서서 함께 주문을 하고 있던 아내가 갑자기 옆에 있는 키오스크로 자리를 옮겼다. 주문을 어려워하던 할아버지를 도와주려 했던 것. 그런데 문제는 아내도 맥도널드를 자주 오는 게 아니어서 키오스크 주문에 익숙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아내는 힘을 합쳐 열심히 키오스크를 연구하고 있었고 그 모습이 귀여웠다. 우리의 주문을 얼른 마치고 옆 키오스크의 주문도 마무리했다. 문제는 나 역시 시스템에 익숙한 게 아니라 주문이 잘 된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우리 주문이야 다시 하면 되지만 호기롭게 나서서 주문을 도와드린 할아버지의 것이 잘못되면 낭패였다. 길을 알려줬는데 알고 보니 길을 잘못 알려줘서 찝찝한 느낌.

그 기분이 들 것만 같았다.


다행히 할아버지의 주문이 먼저 나왔고 이상이 없는 듯했다. 곧 우리 몫도 포장이 되어 나왔다. 매장을 나서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창가에서 햄버거를 크게 한 입 베어 물고 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포기하지 말고 몇번 더 오셔서 익숙해지시길 바랐다.


축령산으로 향했다. 지도를 보고 아내는 목적지에서 가장 가까운 GS25를 찾았다. 며칠 전 집앞에 있는GS25에서 맥주 할인폭이 컸던 걸 기억하고 있던 우리였다. 저렴하게도 사야 하고 맥주도 최대한 식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을 찾은 것이다.

편의점에 도착했다. 할인폭은 매장마다 다르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굳이 힘들게 지도에서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기뻤다. 알뜰하게 사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 자체가 대견했던 것 같다.


아내는 처음, 나는 10년 만인 축령산이었다. 축령산 야영장은 주차장에서 캠핑데크까지의 거리가 꽤 있을 뿐만 아니라 오르막을 올라야 해서 백패킹 모드로 가는 것이 좋다. 짐이 많아 캠핑데크와 주차장을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다 보면 본격적인 캠핑을 하기도 전에 지치기가 쉽다. 한번에 짐을 다 가져가야만 한다. 백패킹 모드를 고집하는 이유다.


우리가 예약한 곳은 캠핑장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데크였는데 경사가 심해서 짐 없이 올라도 숨이 찰 정도였다. 하지만 주차장에서 100m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부담이 되는 정도는 아니다.

짐을 풀고 테이블과 의자만 빠르게 세팅했다. 햄버거와 맥주가 시급했다.


4월 말의 축령산은 그야말로 푸르렀다. 바람은 잔잔했고 은은한 풀내음이 풍겼다.

맥주부터 한 모금.

탄산을 더 그럴싸하게 느끼기 위해 평소보다 더 잦은 목 넘김으로 맥주를 마신다. 그리고 햄버거 한 입.

평일 낮 1시였다.


텐트를 치고 책을 조금 읽다가 주변 산책을 했다. 다른 사람들도 짐이 많지 않았다. 백패킹 모드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 같았다. 음악도 틀지 않고 모두 조용조용 얘기했다. 딱! 원했던 분위기였다. 사람들이 많은데도 숲이 약속한 듯이 고요했다. 마치 그런 걸 원하는 사람들만 모인 것처럼.


해가 질 무렵. 숲이 고요했다


이번 여행은 술을 많이 준비하지 않았다. 소주도 가져가지 않았다. 숙취 때문에 숲의 개운함을 날려버리고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고기와 야채를 구워 먹은 후에 김치를 넣고 어묵탕을 끓였다. 김치 국물의 개운함이 느끼했던 속을 순식간에 가라앉혔다. 어묵탕을 먹는 동안 아내는 계속 얘기했다.


-숨겨 놓은 소주 좀 꺼내 봐. 자기 서프라이즈 잘하잖아. 정말 안 가져온 거야? 에이. 어? 진짜 안 가져왔다고? 매력 떨어지게. 진짜 그럴 일이 없잖아.


술을 많이 가져왔을 것 같은 아저씨들에게 가서 소주 한 병이라도 얻어와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끝까지 웃음으로 잘 넘겼다. (어묵탕을 먹을 거면서 팩 소주 하나 안 챙긴 나, 반성한다.)


다음날, 아침.

새벽 5시 반에 눈을 떴다. 아침잠을 더 자고 싶긴 했으나 소변이 마려워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에 가려면 주차장이 있는 곳까지 100m 정도 내려가야 한다. 새벽부터 신호가 오긴 했으나 참고 참다가 도저히 참지 못해 일어난 것이었다. 텐트 밖으로 나왔다. 잔잔한 안개가 쌓인 숲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만히 앉아서 커피 한잔을 하면 좋겠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소변을 누려고 마음을 먹었더니 갑자기 방광이 팽창하는 느낌이었다. 화장실까지는 아직 100m나 남았다.


급한 경사를 거의 뛰다시피 내려와 화장실을 다녀왔다. 이 시원한 걸 왜 참고 있었을까? 다시 가파른 오르막을 올랐다. 커피를 마셨다. 새벽 6시였다.

다시 잠을 청하려 누웠는데 뒤척거림에 깬 아내가 잠결에 말을 했다.


-몇 시인데?


-응. 6시.


-화장실 다녀온 거야?


-응. 새벽부터 죽는 줄. 아주 시원하고만.


-부럽!


부럽다면서 아내는 다시 잠을 잔다. 아직 참을만했나 보다.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잘 참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아내의 방광이 나보다 튼튼할지도.


아침에 일어나 해먹에서 책을 조금 읽었다. 일부러 얇은 책 두 권을 가져왔는데 한 권은 전날에 다 읽었고 두 번째 책이었다. 캠핑장 해먹에서 책 읽기처럼 근사한 시간도 없다. 나는 그 시간을 사랑한다. 아내는 나의 시간을 존중해 준다. 내가 먼저 책을 내려놓기 전까지 말도 시키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아내와의 여행이 가장 편안하다. 특별히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가 될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틈틈이 매워져 있다.


이름이 낭만적이라고 생각해서 10년전 구매한 ‘티켓투더문’해먹




오는 길에 아내가 찾아낸 막국수 맛집에서 막국수를 먹었다. 맛있었다. 평일에도 사람이 많았다. 막국수를 먹으며 아내에게 '맛집을 아주 잘 찾는다'고 여러번 말했다. 잘한 건 열 번 칭찬하고 못한 건 한번만 말하면 된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더 그렇게 해야 한다.


시장에 들러 장을 보고 가게 문을 열었다. 캠핑을 했던 복장 그대로였다. 회사원들이 쉬는 '근로자의 날' 전 날이었음에도 손님이 많지 않았다. 요즘 늘 그런 편이다. 그리 속상하진 않았다. 나는 캠핑까지 다녀와서 가게 문을 연 것에 만족했다. 예전에는 그렇게까지 아등바등 살아야 하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가게문을 꾸준히 연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를 몸소 깨닫고 있다.


손님이 없어 평소보다 한 시간을 일찍 마감하고 집으로 왔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치킨 냄새가 훅 풍겼다.


-아놔. 치킨.


-슬슬 배고프긴 해.


-어떻게? 시킬까?


-그럼 딱, 오늘까지만 먹을까?


-당연하지. 뒤풀이 없는 여행은 여행도 아니여!


신발도 벗기 전에 배달앱을 켜고 주문을 했다.


-오는 시간 30분. 30분 내에 일단 정리하자.


-오케이!


각자의 배낭에서 침낭을 꺼내 베란다에 널어 두고, 옷가지를 벗어 세탁기에 넣어두고 전기용품을 꺼내 배터리를 빼두고 남은 음식물을 냉장고에 정리하고 나니 시간이 남았다. 내가 먼저 얼른 샤워를 하고 나오니 정확하게 치킨이 도착했다. 치킨을 세팅하는 동안 아내가 씻었고 나는 맥주 한 모금을 먼저 마실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30분 만에 모든 정리를 마친 환상의 복식조였다.


-고생했어.


-딱 오늘까지만 야식이다. 내일부터는 또 관리하는 거야.


-오케이!


밤 11시 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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