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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명찬 May 27. 2024

속 뒤집어지는 얘기

엄마와 통화를 하면

안동으로 가고 있다. 재활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버지를 만나고, 처갓집에 들러  장인, 장모님과 시간도 보낼 겸 해서 1박 2일로 다녀올 참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안동이라고 하면 멀다고 생각하지만 KTX를 타면 2시간 반이면 도착하니 하루 일정으로도 충분히 다녀올 만하다. 아버지의 재활을 안동에서 하기로 결정하게 된 큰 이유 중에 하나가 서울에서의 접근성이다.  1년 동안 우리 가족은 KTX를 이용하여 안동을 한 달에 두 번 이상 수차례 다녀왔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아버지 면회를 2~3시간 하고 돌아오면 서울에 4~5시에 떨어진다. 하루를 꼬박 써야 하는 스케줄이지만 서울 외곽에 재활병원이 있어도 시간 쓰는 것은 비슷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좋은 선택이었다. 재활을 진정성 있게 해 준 안동복주병원에서 아버지는 많이 호전되었으니……


주목적은 아버지를 보러 가는 것이지만 당일치기로 갈 때랑 하루 자고 올 때랑은 마음가짐 자체가 다르다. 당일로 갈 때는 오로지 아버지와의 시간을 보내는데 집중이 되지만 하루 자고 올 때면 마음의 여유가 있어 안동의 맛집 한 군데 정도는 들르는 편이다.

온전한 여행은 아니지만 여행의 느낌이 든다. 같은 창밖의 풍경도 다르게 느껴지니 마음 먹기에 따라 많이 달라지는 것을 안동에 가는 기차 안에서도 느끼고 있다.




토요일에  A를 행사장에서 만났다. 가게 근처에서 ‘플리마켓’이 열렸는데 A가 셀러로 참여했던 것.

프랑스 국적인 A를 처음 만난 건 4년 전이었다. 근처에서 가게를 운영하던 그와는 자연스럽게 마주 칠일이 많았고 우리는 눈인사를 오랫동안 주고받다가 통성명을 했다. 나이가 비슷해서 그런지 나는 그가 편안했다. 그 역시 그랬는지 나를 보면 멀리서부터 인사를 했고 가까이 와서 서로 잘 통하지 않는 언어로 얘기를 나누곤했다.


3개월 전 와인바에서 우연히 만난 그는 우리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들이 태어났다는 것. 아내가 임신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이가 태어난 것은 처음 듣는 소식이라 아내와 난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그날, 잠에 들기 전 나는 아내에게 얘기를 했다.


“A를 다음번에 만나면 축하한다는 의미로 봉투라도 해서 전달하면 좋을 것 같아.”


아내 역시 좋은 생각이라며 찬성했었고 3개월이 흘러 그를 토요일에 만난 것이다. ‘플리마켓’에서 가볍게 A와 인사를 마친 후 가게에 돌아온 우리는 그날의 영업에 집중했다. 날이 좋아서 그런지 최근의 주말보다 사람이 많았다. 게다가 지인의 부탁으로 단체손님까지 받게 돼서 이리저리 정신이 없었다.

손님들이 어느 정도 빠지고 나니 주방이 엉망이었다. 썰다만 재료는 이리저리 흩어져 있고 설거지는 싱크대에 쌓여있고 온갖 양념통의 뚜껑들이 열린 채 널브러져 있었다. 하나하나 치우기 시작했다. 어지럽혀진 주방은 전쟁터를 방불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때 주방에 들어온다면 정말 폭격이라도 맞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내와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각자의 일에 집중했다. 20분 만에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주방이 정리됐다. 사시 사이 손님들의 요구를 들어주며 치웠음에도 오픈할 때의 깨끗한 주방으로 돌아왔다. 5년 동안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아도 이럴 때 느낀다. 우리도 많이 늘었음을.


주방 한편에 녹초가 되어 앉아 있는 나를 보고 아내가 물었다.


“그런데. A  아들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그때 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네.”


“그러게. 나도 기억이 나질 않아. 그런데 왜?”


“봉투에 이름하고 함께 덕담이라도 써줄라고!”


사실 나는 잊고 있었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고민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으로 소정의 금액을  A에게 전달하고 싶었는데 최근 매출이 워낙 바닥을 찍다 보니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인 일이라 부담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선물을 할 바엔 하지 않는 게 맞다는 소심함이 작동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다시 나를 제자리로 가져다 놓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나는 아내에게 얘기했다.


“아직 있는 것 같은데 이따가 만나게 되면 아무렇지 않게 살짝 물어볼게,”


마지막 손님들만 남고 라스트 주문까지 끝난 후, 아내에게 가게를 맡기고 플리마켓 현장으로 다시 갔다. 플리마켓은 이미 끝나 있었고 행사 관계자들끼리 조촐하게 뒤풀이를 하는 중인 것 같았다.  A도 다행히(?) 아직 있었다. 자연스럽게 아이 이야기로 주제가 흘렀고 나는 이름을 물었다. 그리고 나는 카톡으로 아내에게 아이의 이름을 전달했다.


가게에 돌아오니 아내가 흰 봉투를 주었다. 직접 쓴 덕담이 예뻤다.


‘루안아. 세상에 온 걸 환영해!’


인사하러 들른 A에게 우리는 봉투를 전달했다. 한사코 사양을 하던 그는 우리의 마음을 알아서 인지 ‘고맙다’고 몇 번의 인사를 반복한 후 봉투를 받았다.


뿌듯한 밤이었다.





엄마와 통화를 한 건 일요일 낮이었다. 얼마 전 무릎 수술을 한 엄마는 혼자 지내며 아침, 저녁으로 재활운동을 하고 있는데 혹시나 마음이 적적할까 봐 하루 걸러 하루 정도는 전화를 하는 편이다. 엄마가 아픈 후 원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했었다. 끼니는 잘 챙겨 먹었는지 사준 영양제는 잘 챙겨 먹었는지 확인을 했다. 그런데 얼마 전 엄마와의 통화 이후로 나는 의도적으로 전화를 줄이고 있는 중이었다.

엄마는 여전히 나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종용을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아픈 후 그 빈도가 더 잦아졌다. 그 문제를 직접적으로 매번 꺼내서 스트레스를 주는 건 아버지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픈 후 바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엄마가 나에게 얘기를 하고 있으니 스트레스를 주는 주체만 다를 뿐 상황은 똑같았다.


마흔에 가까워 늦게 결혼한 우리가 처음부터 아이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결혼 후, 많은 곳을 다니며 생각했고 퇴직과 함께 시작한 가게가 코로나와 맞물려 경제적으로 흔들리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아이 없는 삶으로 굳혀졌다.

그런 상황을 모두 알 텐데도 마흔 중반을 넘어 오십에 가까워지는 우리를 보고 ‘아이’ 얘기를 하는 엄마가 야속했다. 물론 엄마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얘기했던 그날도 엄마는 속상했을 것이다. 막내 이모의 아들도 임신 소식을 알렸고 셋째 이모의 딸도 임신 소식을 알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속상하다며 나를 나무라듯 볼멘소리를 쏟아내는 그 얘기를 편안하게 들어줄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엄마의 건강 때문에 여러 가지로 고민이 많은데 그런 얘기를 하니 부모라는 존재가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자연스럽게 전화하는 횟수를 조금씩 줄여가고 있는 중이었다.


일요일에 전화를 했을 때 나는 평소처럼 물었다.


“밥은 먹었어?”


“어! 나, 운동하다 만난 아줌마가 같이 밥 먹자고 해서 그 아줌마네 집에서 밥 먹고 가는 길이야.”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인데 덜컥 겁부터 났다.


“무슨 운동하다 만난 사람 집에서 밥을 먹어? 밖에서 먹은 것도 아니고.”


“응. 집에 가는 길이니까. 이따 통화해.”


아직 그 아줌마와 함께 있는지 엄마는 전화를 빨리 끊으려고 했다. 하루 종일 신경이 쓰였다. 괜히 사기를 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저녁 늦게 다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알아서 하겠지만, 나는 괜히 걱정됐어. 요즘 나쁜 사람들이 많잖아. 뉴스만 봐도 속아서 사기당하는 사람도 많고.”


“사기는 무슨. 사기당한다고 줄 것도 없어.”


“엄마가 줄 게 왜 없냐? 아파트 그거 엄마 명의잖아.”


“이거 누가 달라고 내가 사인할까 봐?”


“그래 사인할까 봐.”


“그런데 그나저나 엄마 오늘 너무 창피하고 속상해서 죽는 줄 알았어.”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고 전화를 끊으려는 데 갑자기 엄마가 화제를 바꿔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 아줌마가 나보다 일곱 살이 많은데 무릎이 안 좋아서 아파트 세주고 여기 옆에 단층 빌라 있잖아. 거기 1층에 이사와 살고 있다네. 그런데 오늘 어찌나 자기 손녀딸 사진을 보여주면서 자랑을 하는데 나는 보여줄 게 있어야지. 속상하고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어. 아마 그 아줌마도 생각했겠지. 저 여자는 아무 말도 없는 걸 보니 자식이 없나 보구나.”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엄마 말을 그대로 흡수하고 있었다. 2분 동안 혼자 얘기하던 엄마는 전화가 너머로 들리는 내 고요한 숨소리를 듣고 눈치챘는지 얼른 아버지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아버지 병원 이번주에 간다고? 간 김에 주치의도 만나봐. 평일이니까 주치의도 자리에 있을 거야. “


“……..”


”듣고 있어? 오늘 전화가 먼지 니 얘기는 잘 안 들려. “


안들리는 게 아니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응. 알았어. 엄마 끊어.”


이틀째, 엄마와 전화를 하지 않고 있다. 뒤집힌 마음을 잘 추스르고 얘기를 해야 좋을 것 같다. 나는 내가 감내할 부분과 따져야 할 부분을 고민하고 있다. 분명히 따져야 할 부분인데도 생각이 거듭될수록 감내해야 할 부분으로 넘어간다. 부모와의 관계가 그래서 참 어렵다.




안동으로가는 ktx 안에서 일기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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