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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명찬 Nov 23. 2023

요리의 기쁨

기다리는 마음 - 햄버거

운전을 하며 어떤 음악을 찾기도 귀찮을 때 라디오를 틀어둔다. 평소 내가 듣지 않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잊고 있던 음악이, 잊고 있던 기억이 생생하게 무작위로 찾아온다.


얼마 전에도 그랬다. 가을이 왔나 싶었는데 갑자기 겨울처럼 추워진 그날.

라디오에서 가곡 '기다리는 마음'이 흘렀다. 나는 얼마 전까지 그 노래의 제목이 ‘일출봉’인 줄 알고 있었다. 라디오 dj가 다시 한번 노래의 제목을 짚어주기 전까지 말이다. 그 노래를 처음 들었던 때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으니 오랜 시간을 제목도 제대로 모른 채 좋아하고 있었다. 이제 막 국민학교를 들어간 여덟 살짜리 남자아이가 중학교 형, 누나들의 합창을 듣고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던 그 순간을 나는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작은 지업사의 직원이었던 아버지의 월급만으로 두 아들을 키우기가 어려웠던 엄마는 늘 일을 했다. 식당을 운영할 자본금도 없었기 때문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식당에서 일을 했는데 나와 동생이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나는 엄마가 차려놓은 반찬으로 동생과 함께 저녁까지 챙겨 먹었는데 아버지가 늦게 들어오는 날에는 몰래 라면을 자주 끓여 먹었다. 나름 철저하게 설거지까지 해놨지만 저녁 늦게 들어와 반찬이 줄지 않은 것을 확인한 엄마는 우리가 밥 대신 라면을 먹은 걸 단번에 알았다.


-라면을 일주일 연속 먹으면 병에 걸려.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 그런 줄 알고 있었다. 국민학교에 들어갈 즈음 엄마는 햄버거 장사를 시작했다. 꿈만 같았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서 엄마를 기다리지 않아도 됐다. 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 보러 갈 수 있었다. 엄마의 햄버거 가게는 공릉동의 한 중학교 안에 있는 작은 매점이었다. 3평 남짓한 간이 철제 건물 안에는 작은 냉장고와 햄버거 재료가 빼곡하게 쌓여 있었는데 엄마는 그 안에서 하루 종일 햄버거 패티를 구웠다. 점심시간뿐만 아니라 십분 밖에 안 되는 쉬는 시간에도 학생들이 몰려왔다.


엄마를 보러 가는 것도 있지만 나는 햄버거를 먹으러 자주 갔다. 그렇지만 내 바람과는 달리 엄마는 쉽게 햄버거를 내주지 않았다. 매일같이 조르는 나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집에 가서 숙제하고 밥 먹어'였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허락을 했지만 나에겐 너무 부족했다.

그날도 나는 햄버거가 너무 먹고 싶어서 엄마를 졸랐다.


-나 정말 먹고 싶다고 햄버거 먹고 밥도 먹으면 되잖아.


-밥을 먹어야지. 햄버거 매일 먹으면 안 좋아.


-엄마! 그럼 엄마는 나쁜 햄버거를 형, 누나들에게 파는 거야?


나름 꾀를 내 엄마를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했지만 엄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고집이 고약했던 나는 생각대로 되지 않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나름 번뜩이는 대답으로 엄마를 항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맘대로 되지 않으니 서러웠던 것이다. 처음에 억지로 쥐어짜던 눈물이 나중에는 진짜 방울이 돼서 떨어졌다. 눈을 껌뻑거릴 때마다 내 자신도 놀랄 정도로 눈물이 흘렀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제풀에 지칠 때까지 기다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더욱 서러움이 붇받쳐 울고.

그때 장엄하면서도 고요한 피아노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그리고 변성기가 찾아온 중학생 형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쇳소리 같았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


아득했다. 몽롱했다. 처음이었다. 음악을 듣고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은.

온통 정신을 뺏기고 있는 그 순간. 바로 후렴구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중학생 누나들의 목소리였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빨래소리 물레소리에 눈물 흘렸네


형 누나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웅웅거렸다. 머리카락이 쭈뼛거리고 간지러웠다.  엄마가 햄버거를 팔던 가건물 바로 위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음악실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겨울에는 방한이 되지 않을 정도로 얇은 철제로 만들어진 엄마의 햄버거 가게가 형 누나들의 목소리의 울림에 바르르르 떨렸다.

어느새 눈물이 그쳤다. 엄마는 익숙한듯 흥얼거리며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불판 위에서 햄버거 패티가 뜨겁게 익어갔다. 냄새가 달달했다.



-



집에서 햄버거를 만들었다.

먹고 남아 냉동실에 넣어뒀던 불고기에 치즈를 갈아 넣고 한번 더 바싹 볶았다. 수분이 날아가고 치즈로 인해 진득해진 불고기는 햄버거 패티로 훌륭하다. 야채도 이미 있기 때문에 따로 넣을 필요도 없다. 슬라이스 치즈를 한 장 얹고 토마토를 잘라 넣으면 완성.


꼭 햄버거 번이 아니더라도 좋다. 살짝 구워낸 베이글을 반을 갈라도 좋고, 핫도그번에 불고기를 가득 넣어도 좋다. 엄마와 햄버거를 사 먹으며 옛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곧 직접 만들어해줘 봐야지. 건강한 재료를 많이 넣고 엄마가 맛있게 먹는 걸 보면서 그때 기억나냐고 다시 한번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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