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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대 Jun 16. 2024

그 아이

존버



이 이야기의 때는 대한민국이 경제적인 부흥을 시작하던 1980년대 장소는 대한민국 서울 근교의 경기도에 사는 한 아이의 이야기다.

그 아이는 1남 5녀의 막내 1남으로 태어났다.
그 아이의 집안은 부유했다.
그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그 아이의 아버지는 평택이라는 중소 도시에 유지였다.


그만큼 넉넉한 가정이었다.
그 아이가 태어나기 1년 전 그 아이의 아버지는 사업 확장을 하였다.


세상 일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듯 그 일이 잘못됐다.
그 아이는 살아보지 못한 큰 집에서 그래서 나오게 됐다.

그리고 자주 이사를 가야 했다.
그 사업 이후에도 그 아이의 아버지는 재기를 위해서 조그만 장사를 하셨다.
그것들도 잘 안되었다. 빚은 점점 쌓여갔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일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정말 호인이었다.
친척이건 친구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항상 내밀었다.


또 악한 사람들이나 갑질하는 사람한테는 당당하고 정의로운 그는 해결사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별명이 그랬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학창 시절부터 주먹도 셌고
부유했으며 의리와 정의를 간직한 보기 드문 영웅호걸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사업 실패 후에 달라진 주위 사람들,
또 자신이 손 내밀어 준 사람들에게 거절당한 상처들은 컸다.


순수한 만큼 더 아팠을 것이다.
마흔이 다되어서야 직장 생활을 하려는 그 아이의 아버지는 쉽지 않았다.


집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줄이 낳은 자식이며
아내를 보자면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마음이 앞섰을 것이다.


그때 당시에도 분명 어둡게, 정의롭지 않게 돈을 버는 방법들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의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 누구에게나 어려운 것이다.


그 당시의 대한민국도 현재의 한국처럼 직장을 다닌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나 보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그 이후로 10-20년간을 타의에 의해 일하지 못했다.


그중에도 여러 일들을 시도하고 장사도 해봤지만
매번 실패의 고배를 마셨다.


그 아이의 엄마가 고생이 많았다.
그 아이의 엄마는 정말 아리따운 분이었다.
그 아이의 눈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다.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영웅호걸을 만나 결혼을 하고 1남 5녀를 줄줄이 낳고 화목하고 풍요롭게 사는 것.


옛날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가
그 두 사람의 젊은 시절엔 실제였다.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인 그 아이의 엄마는 가세가 기울어지고 고생을 많이 했다.


그 당시에 어른들은 다들 어떻게 그렇게 살았나
싶을 만큼 1남 5녀 아이들을 뒷바라지하며 직장도
다니셨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에게 미안해하고 무능한 남편을 무시했다.


그 당시 아침의 풍경은 이랬다.
그 아이 누나들의 도시락 7-8개를 싸서 등교시키고 일을 나가셨다. 정말 슈퍼우먼이었다.


반면,
호걸인 그 아이의 아버지는 호걸에서 백수가 되셨다. 적어도 그 아이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엄마는 고생하고 아빠는 무능하구나.”


그 아이의 생각은 점점 관념처럼 굳어졌다.
그 아이가 아이에서 청소년이 되고 성인이 되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아이의 생각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 아이는 자연스럽다고 표현할 만큼 아버지를
무시하고 동시에 미워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엄마를 힘들게 하는
원흉이라고 그 아버지를 인식했다.



그 아이가 군대를 갔다.
그 아이는 마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집을 나갔다. 군대가 구질구질한 집에 피난처인 것처럼.


그 아이의 손에는 아버지의 편지가 들러있었다.
그 아이와 아버지는 오래도록 대화가 없었다.
그런데 편지라니 아이는 놀라움에 그 편지를 뿌리치지 못했다.


그 아이에겐 아버지가 편지를 썼다는 것에 대한
생소함이 무척 컸다.


평상시 아버지의 모습을 보자면 글이나 책이랑은 담을 쌓으셨고 티브이에 빠져서 시간만 죽이는 한심한 모습만 보았기 때문에 미워하는 마음이 더 컸지만 뿌리치지는 못했다.


군대를 들어가서 수일이 지나서 급속도로
집이 그리워졌다.


그 아이는 남들 몰래 화장실에서 그 편지를 읽었다.
그 아이는 한참을 화장실에서 나올 수 없었다.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아이 아버지의 편지는 맞춤법이 많이 틀려있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했다.


아마도 살아생전 처음 편지를 쓰신 것처럼 편지는 엉망이었다.
50이 넘어 아들에게 쓴 첫 편지.
그 편지는 맞춤법도 표현도 다 엉망이었지만
감출 수 없는 그 아버지의 서툰 사랑이 전해졌다.
많이 미안해하고 사랑한다는 걸 그 아이는
그 편지에서 모를 수가 없었다.


사람은 말로 하는 의사 표현보다 더 강력한 게 있다.


무언의 몸짓이나, 태도가 숨은 단어나 감정을 이야기하고 더 강력히 전달하듯 그 편지는 강력했다.


20여 년간 쌓였던 오해와 무시, 미움에
그렇게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10여 년이 흘러 그 아이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세상을 살면서 인생이 어렵다는 걸 뼈저리게
알게 될 때마다 그 아이는 아버지를 생각한다.
“참 힘드셨겠네요 아버지.
외로우셨겠네요 아버지. “


그 아이의 아버지는 이제 70이 넘으셨다.
중년의 때에 하지 못한 일과 가정에 헌신을
보상하듯 지금은 참 열심히 일하시고 엄마를 돌보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인 엄마에게
병이 생기고 오랜 지병으로 이제 외형은 달라지셨다.


하지만 그 아이의 아버지에게는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이시다.


아이는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아버지가
존경스러워진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수 십 년간 자신의 인생에 존버하셨다.


세상에서도 무능하다고 괄시와 무시를 받았지만
가장 가까운 존재들인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세상에 어디에도 그의 편은 없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의 이야기다.
솔직하게는 나도 아버지를 존경하게 될 줄 몰랐다.
너무 오랜 시간 오해했기에 또 미워했기에..


나는 아버지가 어떻게 본인의 삶을 존버하고 살으셨는지 그리고 이겨내셨는지 정확한 방법은 지금도 모른다.


다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게 된 나의 슈퍼스타 아버지의 그 길을 아들로서 따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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