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만남: 사랑해, 갓 태어난 라!
-도도새를 거의 매일 만났어요. 말을 건네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어요. 그저 포근하게 안아준 적이 더 많았어요. 그게, 참 신기하게도 따사한 햇살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자꾸 울었어요. 내 안에 도도새가 정말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했거든요. 눈물이 왜 났냐 하면요. 보잘것없는 내가 이런 다정함을 받아도 되는지, 믿어지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아요. 사흘 정도 지나서는 울지 않았어요.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어요.
라의 눈물에 대해 나도 알고 있다. 오래전에 나도 그랬으니까. 드물게 긍정 감정이 들면, 의심부터 했다. 시궁창 쥐인 내가 이런 감정을 가져도 될까? 감히 내가 이런 감정을 가져도 되나? 이 감정은 내 것이 맞나? 내가 과연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걸까?
그런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나한테 해대곤 했다. 오랫동안 했던 대로 슬픔, 우울, 억울, 분노에 빠져서 지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왔다.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긍정은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이런 상태는 꽤 오랫동안 지속 되었다. 진정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닌데도 익숙한 것은 그런 것들이었다. 칭찬과 격려가 어색했다. 간혹 누군가 그런 말을 하면, 곧이곧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저러다 어느 순간 뒤통수를 때릴 게 분명할 거라고만 생각했다. 어머니가 그랬으니까. 어느 순간 다정한 듯하지만, 언제 돌변할지 알 수 없었다. 마음 터놓고 얘기한 것을 꼬투리 잡아서 다그치거나 빈정거렸다. 그렇게 해놓고는 다시 어머니한테 마음을 내기도 했다. 여지없이 공격당하는 것이 반복되면 또 스스로 자책하곤 했다. 어머니한테 마음을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며 수 없이 경계했지만 소용없었다. 어머니한테 마음을 털어놓지 않겠다고 한 결심을 실천에 옮기기까지는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그래도 엄마인데, 이런 생각이 비집고 올라오곤 했다. 사실, 엄마는 엄마가 아니었다.
엄마는 아이였다. 그것도 여섯 살 배기였다. 자신이 생각한 것,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으면 난리를 부리는 아이. 예전에 사이코드라마 과정 수련을 할 때였다. 내가 주인공이 될 차례였다. 항상 마음에 응어리져 있던 어머니를 불렀다. 드라마 진행 중 디렉터가 한마디로 어머니가 어떤 정신적 문제를 가졌는지 물었다. 우울증이라고 했는데, 디렉터는 우울증? 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드러낸 이상 증상과 우울증은 잘 대입되지 않았다. 그걸 알았지만, 차마 어머니를 ‘인격장애’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면 불효를 저지르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딜, 엄마보고 인격장애라고 해! 어디서 감히! 이런 호통 소리가 마음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사실, 이 내면의 소리도 어머니가 덧입혀져서 내는 소리였다.
어머니는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다. 이 사실을 고백하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경계성 인격장애의 특징을 한마디로 하자면, 이렇다. “난 네가 미워! 나한테서 떠나지 마!” 폴 메이슨(Paul T. Mason)과 랜디 크리거(Randi Kreger)가 쓴 ‘잡았다, 네가 술래야-경계성 성격장애로부터 내 삶 지키기’라는 책에서는 이들의 심리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여섯 살배기 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광장으로 나갔다. 갑자기 엄마는 사라지고, 사납고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눈동자들만 빼곡하다. 약간 덜하고 더할 때가 있긴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상태가 이어진다.”
대부분의 이상 증상처럼 경계성 인격장애도 유전된다. 그것은 에너지 때문일 것이다. 부정에 사로잡힌 가정 분위기 안에서 그 부정에너지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부정이 배어든다. 보고 들으며 자라나면서 그 부정의 영향은 속속들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어느 사이에 나도 어머니처럼 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삐딱하게 보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극도의 화가 치밀어 올라 어쩔 줄 몰라했다. 날카롭게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모든 것을 의심했다. 상대방을 치켜세우다가도 내가 원하는 모습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대번에 질타를 가했다. 나에 대해서도 극과 극으로 치닫는 생각을 했다. 내가 봐도 내가 참, 멋지다고 추켜세우다가도 여차하면 바닥에 처박았다. 어머니를 증오했지만, 증오한 만큼 나도 모르게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었다. 그것조차 잘 모른 채 살아왔다. 그저 내가 피해자이고, 어머니는 오로지 가해자 자리에 올려놓고 손가락질을 해댔다.
괴물처럼 되기를 멈춘 것은 사실,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기적. 뭔가를 잘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내가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어요. 그저, 잘하지 않아도, 이렇게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랑스럽고 사랑받을 수 있답니다.
라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많이 아프고 고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렇게 일찍 깨달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다. 라는 행운아다!
라는 ‘괜찮아, 잘했어, 잘할 거야’를 매일 습관처럼 하고 있다고 했다. 아마도 그래서 도도새의 사랑을 받을 마음도 생겼을 거라고 했다. 멋진 라!
케빈 컨(kevin kern)의 ‘another realm’을 배경음악으로 시를 낭송해 보자고 했다. 라의 눈이 또 한 번 더 휘둥그레졌다. 이렇게나 짧아요? 그냥 말을 적어놓은 것 같은데 이것도 시인가요?
일찍 늙고 보니
반칠환
어머니는 마흔넷에 나를 떼려고
간장을 먹고 장꽝에서 뛰어내렸다 한다.
홀가분하여라
태어나자마자 餘生(여생)이다.
시가 맞다. 길고 연과 행의 구별이 없는 산문시도 있지만, 아주 짧은 시도 있다. 4행이면, 그렇게 짧은 것도 아니다. 반칠환은 1964년 충북 청주 중고개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하고 1992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옮겨 놓은 것 같다. 어머니한테 들은 이야기일 것이다. 마흔넷에 나를 임신한 어머니.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옛날로 치면 꽤 나이가 들어서 한 임신이다. 임신한 것을 알고 낙태하려고 용을 썼던 어머니의 행위가 진솔하게 적혀 있다. 어머니는 간장을 먹고 장꽝에서 뛰어내렸다. ‘장꽝’은 충청도 사투리로 장독대를 일컫는다. 전체 4행 중에서 첫째와 둘째 행이 어머니가 한 행위라면, 셋째, 넷째 행은 화자의 마음이다. 이 사실을 다 자란 이후에 듣고(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아직 철 모르는 어린 시절에 들었다면, 상처가 깊숙해서 그다음의 구절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 홀가분하다고. 태어나자마자 여생이라고. ‘여생’은 말 그대로 앞으로 남은 인생이다. 죽을 뻔했는데 태어났으니, 탄생 즉시 남은 생으로 시작하는 셈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냈을까? 대부분 자신의 잉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것이 부정이라면, 언짢기 마련이다(사실, 나이가 들어서 들어도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어떻게 삶을 꾸려왔는지가 중요하다. 너그러움을 가질 정도라면, 분명 시인답다!). 원하던 임신이었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엄마의 마음이 정해지고, 아이는 고스란히 그 감정을 물려받는다. 자신의 존재가 환영받지 못했다면, 이 세상이 자신을 배척하는 것만 같을 것이다. 세상도 외면한 존재라는 인식은 삶의 시작부터 그르치게 된다. 좀 자란 이후에 알게 되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아이에게는 엄마가 세상이므로 엄마의 거부는 세상의 거부가 된다. 자신을 없애려고 애를 썼다는 사실은 치명적이다. 괜히 잉태되었고, 괜히 태어나서 엄마를 고생시켰다는 사실은 안타까움을 넘어서 분노하게 한다. 원하지 않는 아이를 잉태했던 부모한테, 그런 부모를 만난 운명한테, 운명을 결정짓는 신한테 골고루 화가 치밀어 오른다. 이 화는 근원에 대한 뿌리 깊은 원한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런데 이 시의 주인공은 전혀 그런 마음을 내비치지 않는다. 오히려 ‘홀가분하다’고 하고 있다. 기대하며 희망을 품고 기다리고 환영하고 그런 마음이 없으니 오히려 홀가분하다고?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엄마에 대한 원망은 어디로 간 것일까?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처럼,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마음이 들 수 있다. 죽을 뻔했는데도 태어났으니 모든 생은 여분의 생, 남은 생이다. 그저 홀가분할 따름이다. 죽지 않고 살아났으니 보너스로 받은 인생이다. 얼마나 신나는 삶인가! 이미 죽고 나서 부활한 듯한 삶이기도 하다. 혹은 죽었다 치고 여유로 받은 삶이기도 하다. 남은 생은 축복일 수밖에 없다. 죽이려고 했는데 안 죽고 살아나고 태어났으니 모질게도 질긴 목숨이기도 하다. 없애려는 행위를 뒤엎는 운명이기도 하고, 죽을 뻔했는데 살아난 행운이기도 하다. 태어나자마자 기적과 행운의 시간이 펼쳐져 있다. 얼마나 기쁜 사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