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숙제는 흔하지 않다. 놀이와 과제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놓인 이런 숙제를 받으면 벌써 짜릿하다. 어떻게 할지 그 방법만 수십 가지다. 하고 싶은 게 이렇게 툭 튀어나오는데 어찌 하기 싫은 것을 할 시간이 나겠는가. 재미있는 것은 빨리해야 한다. 미루면 안 된다. 재미있는 것은 빨리 해치우고 그 재미를 곱씹어야 한다. 이런 숙제는 만천하에 알려야 한다. “엄마 나 숙제 있어.”
건드리지 말라는 소리다. 노는 것 같지만 노는 게 아니란 소리다. 내가 지금 매우 합법적인 할 일이 있으니 엄마가 시키는 것을 안 하겠다는 소리다. 동네 지도를 어떻게 만들지, 크레용으로 그릴지, 물감을 쓸지, 스케치만 할지, 수수깡이나 성냥갑 등을 사용해 입체적으로 할지… 계획과 방법이 십수 가지다.
주연이와 집으로 오는 길에 동네 지도 숙제를 같이하기로 했다. 주연이네 집은 우리 집에서 발자국으로 300걸음 떨어진 집에 산다. 아니, 가게에 산다. 학교에 오고 가는 길에 수연이나 집이 있다. 아침저녁으로 같이 학교에 가고 오고 했다. 머리가 엉덩이까지 길고 그 머리를 길게 땋아 늘어뜨린 주연이의 양쪽 볼 위에는 주근깨가 10개씩 사이좋게 올라와 있다. 11살이 되면 주연이의 양 볼에 주근깨가 11개로 늘어날지도 모른다. 머리를 더 기를지도 궁금하다. 12살에도, 13살이 되어도 주연이와 계속 친해야겠다.
주연이는 삼성동 에이아이디 아파트 2단지 건너편, 상업은행 옆 뉴욕제과점 건물 1층 ‘통통통 만두 가게 위에 산다. 통통통 만두 가게를 열고 들어가면 왼쪽에 주연이 아버지 서 있다. 주연이 아버지 뒤쪽으로는 늘 쉐에에~ 음향효과가 나고 성난 수증기가 씩씩 올라온다. 주연이 아빠가 서 있는 주방은 드라이아이스가 올라오는 무대 같다. 우리가 가게에 들어서면 절묘하게 스팀이 올라온다. 만두는 ‘빚는다’고 알고 있었지만 내가 볼 때 주연이 아버지는 분명 만두를 바르고 계셨다. 만두 속과 피를 가지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빠른 그 손놀림은, 정성 들여 빚는다기보다는 미장이 장인이 미장손으로 손 빠르게 무언가를 바르는 작업 같았다.
길게 땋아 내려뜨린 머리 때문에 주연이의 별명은 말총머리였다. 아이들이 말총머리라고 주연이를 놀렸다. 내 친구를 놀리는 아이들이 못마땅해 내가 맞받아치면 공격 대상이 바로 바뀐다. 이제 나를 안경쟁이라고 부르며 음률을 넣어 불러댄다. 안경쟁이, 안경잽이, 지은이는 안경잽이… 안경을 썼다고 안경잽이이고, 머리를 땋았다고 말총머리란다. 참으로 직관적이다. 사실… 그리 생기었으니, 그리 부르면, 그러려니 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이상하게 화가 치민다. 그때는 그랬다. 나를 여러 명이 여러 번 부르면 화가 났다.
하지만 그렇게 놀리던 아이들도 몇 년 후 말총머리는 못되어도 대부분 안경잽이가 되었다.
주연이는 말총머리 자기 별명이 듣기 싫으면 머리 모양을 달리하면 되련만 매일 말 꼬랑지같이 머리를 땋고 다녔다. 그 긴 머리를 아침마다 아빠가 곱게 땋아 준다며 별로 자랑 아닌 것을 마치 자랑처럼 자랑했다. 하마터면 부러울 뻔했다.
주연이 집으로 가려면 통통통 만두 가게 문을 열고, 스팀으로 늘 축축하고 뿌연 주연이 아빠를 지나고, 갈색 탁자를 여럿 지나가면 (탁자를 지나가는 방법도 다양해 매일 새롭다. 양쪽 탁자 사이에서 두 팔만 이용해 발을 땅에 닿지 않고 이동한다던가, 탁자 사이사이에 지그재그로 지나간다든지… ) 느닷없는 사다리기, 천장을 뚫고 올라간다. 무슨 이런 재미진 집이 있단 말인가. 머리 위에 집이라니. 사다리를 타고 머리 위로 문을 들어 올린다. 두 손끝을 디귿자로 만들어 천장을 살짝 쥐면, 딱 아랫눈썹만큼 시야가 보인다. 순간, 조금 흥분되며 눈이 커진다. 보통은 수연이의 언니 궁둥이 두 쪽이 먼저 보인다. 수연이 언니가 앉은뱅이책상을 감싸 안듯 등을 굽혀 숙제하고 있다. 수연이 언니의 머리 위로 긴 형광등이 낮에도 끔뻑이고, 형광등 끝에는 아주 작은 창문이 있다.
수연이 집에서는 같이 숙제를 할 수가 없다. 동네가 한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 집 옥상에서 동네 지도를 그리기로 했다. 삼성동 119-1, 32통 1반 초록 대문 2층 베란다에서 보면 삼성동이 다 보였다. 오른쪽으로는 5층짜리 에이아이디 아파트, 뒤쪽으로는 오천 주유소 사거리와 그 건너편 허허벌판에 있던 양지 목욕탕, 앞쪽으로는 1, 2층짜리 정갈한 단독주택 골목길과 그 끝에 보이는 선정릉 소나무 숲. 왼쪽으로는 단독주택 골목들을 한참 지나 3층짜리 삼산 연립과 그 끝에 휑한 테헤란로. 1980년대 초반 삼성동은 10살짜리가 2층 옥상에서 한 바퀴 돌면서 동네 지도를 그릴 수 있었다. 삼성동의 땅끝에 삼성동의 하늘이 붙어 있었다.
“뭐하니”
손에 묻어나는 왕자표 크레파스와 물감, 자, 성냥갑과 수수깡, 망친 종이들이 늘어진 2층 베란다에서 우리를 발견한 엄마가 묻는다.
“학교 숙제예요. 우리 동네 지도 그리기 하고 있어요”
놀고 있지 않음을 확인하여 만족한 엄마가 내려가고 우리는 오래도록 떠들고 웃고 망치고 다시 하기를 반복하며 우리 동네 지도 만들기 숙제를 마쳤다. 한껏 놀고도 숙제를 끝냈기에 참으로 흡족한 오후다. 수연인 통통통 만두 가게 천장으로 사라지고 삼성동 하늘이 어두워졌다.
“오늘 온 얘가 수연이라고 했지?” 저녁 식사 시간에 엄마가 물으신다. “수연인 어디 사니?”
우리 집 골목 입구 통통통 만두 가게 위에 사는 수연이에 대해 신이 나서 얘기를 했다. 스팀에 둘러싸인 수연이 아빠와 가게 안쪽의 사다리와 그 위의 수연이나 집을. 신기한 수연이 세계를.
저녁 식사 후 엄마가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
“아니, 좋은 친구들 사귀라고 8 학군 왔더니 글쎄 통만두 가게 아이랑만 논다, 호호호”
수연이가 잘못한 걸까? 내가 잘못한 건가? 내가 수연이에 대해 말한 것 자체가 잘못인것 같다. 아니면 수연이가 아까 무슨 실수를 했었나? 그것도 아니면 만두가 잘못을 한 걸까? 수연이 아빠가 문제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엄마는 왜 내 친구 얘기를 엄마 친구에게 하는 것일까? 엄마는 왜 수연이에 대해 더 물어보지 않지? 수연이가 공부도 잘하고 얌전하다는 얘기를 내가 빼먹었나? 수연이는 줄넘기도 아주 잘하는데…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는 길에도, 방과 후 집으로 오는 길에도 나는 수연이와 같이 걷지 않았다. 엄마가 수연이와 놀지 말라는 말을 나에게 한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수연이와 멀어졌다. 교실에서도 별로 말을 섞지 않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서히 멀어졌다. 아니, 내가 수연이를 멀리했다. 학년이 올라가며 수연이의 양 볼에 주근깨가 더 늘었는지 줄었는지 나는 모른다. 고학년이 되면서 수연이의 말총머리가 더 길어지지도, 짧아지지도 않고 늘 같은 길이였던 것만 멀리서 본 기억이 난다.
수연이가 그때 뭘 잘못했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왜 수연이와 멀어졌는지 수연이는 아직도 모른다. 내가 왜 수연이를 멀리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수연이가 누구인지 나도 엄마도 알 길이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