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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lm Aug 31. 2024

예순일곱 번째 : 매일매일이 문화충돌의 연속

어린 시절의 중요성을 깨닫는 순간

출처 : Velvet Ashes


어머니가 처음에 저를 가지신 다음에 저를 낳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엄청 고민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유는 입덧이 정말 너무 심해서 견디는 것 자체가 힘드셨다고, 부모님 지인 분들께 정말 귀에 못이 박히게 저는 "유별난 아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출산 예정일이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진통은 안 오고, 어머니는 출산휴가가 전부 다 까먹어가고...... 아버지도 6개월을 휴직하셨는데 당시에 매일 "왜 안 나와?" 이렇게 아버지 친구였던 산부인과 전문의에게 계속 물으셨다고 해요.


그래서 어머니가 의사 선생님한테 가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시더군요.

지금 저 해외 발령이 났고, 여기에서 더 지체하면 잘릴 것 같아서 예정일도 지난 것 같고 빨리 낳게 해 주세요.


아버지가 진료실에 같이 있다가 어머니께 미쳤냐고 하셨다고 허시더군요. 그래서 그날 오후에 바로 수술로 출산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데, 출생신고도 후다닥 하고, 뭔가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이삿집도 싸고 비행기를 탔다고 해요.


이건 원정출산은 아니고, 출산 후 원정이라고 해야겠네요.


어머니는 저를 출산하신 다음에 15일 이후부터 바로 출근을 하셨다는데, 어머니 친구 분들은 어머니가 정말 피를 흘리면서 일했다고...... 하셨는데 저는 그 말씀을 한참 뒤에 이해했습니다.


그리고서 저는 한국인인데 노출된 문화권은 해외인 저금 중도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었어요.


분명히 한국 사람도 충분히 만나고 있는데, 만나는 한국 사람들도 저처럼 태어나자마자 온 것은 아니지만 전부 3-4세 혹은 아예 그 나라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어요.


그리고 유치원이나 학교에 가도 선생님조차도 다 비슷한 환경을 가지고 있으셔서 참 애매한 상황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고 나서 중간에 1년 정도 한국에 와서 학교를 다니고, 아버지가 직장을 다니시면서 조금 불상사가 생기셔서 저는 어머니와 조금 더 해외에 살게 되었는데, 그러고서 중학교 때 한국에 왔습니다.


당시에는 몸이 아프지 않아서 그냥 열심히 공부를 한 것 같아요. 그리고 일단 집이 안정되기 시작해서 크게 신경 쓸 것도 없었어요.


단지 좀 제 신체 부위에 대한 성희롱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부분이 있어서 교육청에 신고를 했는데, 요즘 같으면 공중파 뉴스에 나올 특종인 것 같은데 교육청에서 자꾸 덮으려고 했던 것?

남자 학교인데 왜 이러나 싶었어요.

하여튼 교육청에서는 그 문제를 덮겠다고 혈안이 되어서 아주 생쑈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고 나서 제 글을 자주 보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래 링크의 사건이 터지고, 몸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죽을 고비를 좀 많이 넘기기 시작합니다.

https://brunch.co.kr/@f501449f453043f/10


그리고 얼마 전에는 보니 저 선생이 저한테 엄청 고자세로 나오는 이유가 있더군요. 저를 대변해 줄 선생님들이 다 돌아가셨더군요.


세월 참 빠르다 싶었어요.


그리고 제가 고등학교 때부터 의문이 가는 게 참 많았습니다.


* 대한민국 사람들은 남의 일에 관심이 이렇게 많을까?

* 내 부모랑 나는 다른 사람인데?

* 좋은 대학 나오면 다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건가?

* 뻔히 다 아는데, 왜 거짓말을 하지?

* 편 가르기를 하는 걸까?

등등


대학에 와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져서 그때부터는 그냥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고 다른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4학년 때 다행히 전공선택 과목 교수님이 제가 할 줄 아는 외국어를 하시는 분이라서 약간의 딜을 했어요.

교수님, 이 과목은 시험 안 보고 전부 다 발표를 한다는데 (다른 나라 언어)로 발표해도 되나요?


교수님께서 막 장려하시면서 하라고 하셔서 그냥 그렇게 했어요.


사실 제가 해외에 살았었다는 거를 아는 사람이 학교에서 교수님들 다 포함해도 10명이 안되었는데, 한국어가 막 쉽지도 않고, 다행히 그 전공수업이 다른 나라에서 발달한 과목이라 자료 찾기도 더 쉬웠고, 당시에 과목교수님도 저한테 매일 이러셨어요.

Calm(가명) 하고 싶은 거 다 해.


그 과목이 좋아서 좀 많이 필요 없는 것들을 했지만, 그게 다 자산이 되어서 공공기관에서 일할 때 너무 편했아요. 난 다 아는데 좋은 대학 나왔다는 사람들은 다 백지상태였거든요.


심지어 연구용역을 하는 대학 교수님들도 저하고 당시에 그 과목을 저한테 가르치셨던 교수님한테 물어보고 했었으니까요.


지식적인 부분이 해결되니까 이제는 사회적인 부분이 오더군요.


연애를 하면서 가장 많이 와닿았어요. 당시에 사귀던 친구가 한국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많이 알려줬었거든요.


요즘 유튜브에 제가 살았던 나라에서 사는 한국인들이나 아니면 그 나라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유튜브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다르구나 싶었거든요.


보통 저는 예전에 여자동기 중에서 저한테 한 말은 이렇습니다.

또 누구 죽이려고 기운 모으냐?


처음에는 의미를 몰라서 그냥 아는 척 웃었는데, 저 말이 딱 맞는 말이더군요.


그냥 참고 참다가 쌓이면 터지는데, 보통은 터질 때까지 내버려 두지 않거나 아니면 그 선까지 안 넘어가는 게 보통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청소년기 후반부터 여기 살다 보니 꼭 사람이 폭발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더군요.


당시에 여자친구는 주변에 제가 살았던 나라에서 온 외국인 친구가 많아서 이해는 해줬지만, 항상 저한테 이런 말은 했었습니다.

나도 여기가 싫은데 나중에 (다른 나라) 가서 사는 게 낫겠다.


서론이 너무 길었네요. 어제 친한 형님과 누님으로부터 똑같은 취지의 조언을 들었어요.

그냥 신경 쓰지 마라.


부제로 "어린 시절의 중요성을 깨닫는 순간"이라고 적었지만, 저는 이미 끝났으니 일단 초기화를 하는데 집중해야 하고, 나중에 어쩌다가...... 정말 아이가 생긴다면 해외 생활은 체험 정도로만 시켜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처를 가지고 사는 아버지 때문에 자식이 불편하면 안 되니까요.


그냥 좀 사적으로 두근두근한 일을 앞두고 있는데 생각이 많아지다가, 그래도 좋은 지인들 덕분에 정신을 차리게 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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