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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ea Dec 04. 2024

나를 온전히 이해하는 짝을 만나고 싶다면



양 극단은 함께 존재한다

간혹 '아니 겉으로 멀쩡해보이는데 뒤로 딴짓 다하고 다니더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유독 분개하곤 한다. 표리부동해보이기 때문이다. 거짓말쟁이같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글에서 다루는 경우들은, '내가 그런 것에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끊지 못하는 경우'다. 솔직히 문제란 게 그렇다. 같은 상황에서도 본인이 아무런 괴로움이 없다면 문제로 자각하지 않을것이다.(그냥 즐기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본인이 뭔가 굴레같다고 느끼면 문제인 것이다. 

 

 어쨌거나, '겉으론 멀쩡한 사람이 몰래 딴짓 다하고 다니더라'같은 상황에서 '역시 사람은 믿을게 못된다' '멀쩡할수록 다시 봐야 된다'하는 불신 가득한 통념이 생겨나는 듯 보이는 요즘이다. 그런데 실상은 그것은 표리부동하다, 거짓말쟁이이다 라고 해석하기보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앞서 여러번 설명했지만, 인간이 어떤 한쪽의 극단을 갖고 있으면, 동시에 다른 한쪽의 극단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내가 벽을 왼쪽으로 밀면, 벽은 나를 반대방향으로 밀어낸다. 내가 스프링을 한쪽 방향으로 누르면, 스프링은 반대쪽으로 튀어오를 에너지를 머금고 있다. 물리 시간에 배웠던 작용-반작용 은 한 인간의 내면에도 완벽하게 적용된다. 다만 어느 한쪽의 성향이 더 강하게 발현되는 경우가 많을 뿐이다. 심리학에서는 억압이 심하면 그에 대한 반동으로 뭔가 튀어오른다고 이야기하는데, 그와 비슷한 맥락이다. 꼭 억압이 아니더라도 인간 각자는 알게 모르게 극단성을 가지고 있고, 때문에 그 반대되는 에너지를 내포하고 있거나, 반대되는 에너지를 마주한다. 

 

스스로를 반쪽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는지 

문제는 나의 양극단을 스스로 얼마나 받아들이느냐에 있다. 우리나라는 특히 개인에 대한 도덕적 잣대가 고도로 높고 엄격한 편인데, 우리가 보편적으로 그 잣대 안에서 살아가고, 그 안에서 '좋은 사람'이라 평가받는 아주 좁은 범위의 에너지가 있다. 특히 스스로에게 그런 잣대를 엄격하게 들이대는 경우는, 그 잣대 자체가 스스로를 옭아매는 굴레로 작용하곤 한다.결국 그 범위 안에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만 스스로 사랑하고, 그 이외의 모습은 도무지 스스로 인정을 못하는 경우들이 있다.


 자신이 자신의 에너지에 대해서 이런 제한된 사랑만을 갖고 있는 경우, 그것은 연애나 관계의 문제에서도 확장될 수 밖에 없다.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인정하고 있는 만큼만 타인으로부터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기가 쉽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해서 제한적인 사랑을 스스로 창조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되면 관계에 있어서 완전한 솔직함은 어려울 가능성이 커진다. 물론 자신의 광폭함을 모조리 발산하며 살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은 양극단을 왔다갔다 하는 진폭을 줄이고자 하는 것이다.(진폭은 카르마다) 그런데 자꾸 자신의 한쪽 극단을 숨기고 살아가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알 수도 없고, 그러면 양극단을 오락가락 하는 진폭을 어떻게 줄이는지도 가늠할 수 없게 된다. 


 마치 '지킬앤 하이드'와 같다. 지킬박사의 도덕적이고 세상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모습은 필연적으로 다른 극단을 내포한다. 하이드가 가지고 있는 광폭한 기질 같은 것들이다. '하이드'는 내 관점으로 보면, '스스로 인정하지 못한 자기 모습'에 가깝다. 그것이 사회 통념 안에서 선이냐 악이냐, 하는 것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다만 그 모습까지도 자신의 모습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지킬박사가, 자신의 하이드적인 모습, 그러니까 '저런 광폭한 모습은, 선하지 않은 모습은 내가 아니야'라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자체가 작품 전체에 흐르는 그의 괴로움을 설명해주고 있다. 


 사회 통념이라는 것이, 선과 악이라는 개념이라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의 질서를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기 자신을 반쪽만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때가 많다. 사실 이 지구를 떠나서 우주라는 큰 개념으로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도덕의 개념이나 선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좁은 시야의 사고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양 극단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모두 다 내 모습이다'
'그것은 우주의 질서이다'


이 생각만 갖고 있어도 우리가 스스로를 혐오하는 일은 많이 줄지 않을까. 또 그로부터, 관계성 안에서 나의 일부분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도 줄어들지 않을까. 서로 반대되는 성향의 사람들끼리 물고 뜯으며 너와 나는 다르다고 싸우는 일도 줄어들지 않을까. 너무 유토피아적인 발상인걸까?


자기자신의 양극단을 먼저 받아들이기

어쨌거나 영혼들은 지금의 굴레에서 더 해방되길 바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는 과정부터 시작되게 된다. 내가 스스로 인정하는 내 모습도, 내가 인정하지 않고, 나라고 인정하지 않는 나의 모습도 모두 관찰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내가 인정할 있는 모습만큼만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스스로의 어떤 모습도 스스로 온전히 인정하고 사랑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을 수 있고, 또 그런 부분까지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을 수 있다.


 다만 그런 것들이 자신이 '옳다'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신념과 위배될 때에는 자기 스스로가 그런것들을 마주하기가 두렵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 스스로 만들어낸 굴레다. 사람들에게 '이상하다'고 손가락질 받기가 싫은 것이다. 그것은 특이한 성적 취향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하이드가 가지고 있는 광폭함과 난폭한, 야생적인 습성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혹은 사회적으로는 전혀 이상한 모습이 아니고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이지만 자기 자신만이 아는 자기 부정의 포인트들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한다. 또 그런 부분까지도, 결국에는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모두 기다리는 짝이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닐까. 내가 좋은 사람을 연기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나의 밑바닥을 아는 사람. 그 모든것을 알면서도 나의 여정을 함께 노력 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 


 그에 앞서서 묻고 싶다. 상대방에게 그것을 드러낼 자신이 있는지 말이다. 아니, 그에 앞서서 자신이 싫어하고, 부정하는 자신의 모습을 먼저 사랑할 수 있는지 말이다. 결국 우리가 우리를 온전히 이해하는 짝을 만나고 싶다면 자신에게 내포된 양극단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 우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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