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의 주요한 테마는 좀더 깊은 수준에서 '함께 하는'삶을 살아보는 것이었다. 원래 인생은 혼자 사는거 아닌가,할 수도 있고, 반대로 함께 하는 삶은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 싶을 수도 있을거다. 사실 둘 다 맞는 얘기다. 나라고 누구와 함께 하는 법을 전혀 몰랐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아마도, 나는 내가 원래 갖고 있던 것 보다도 더 깊게 누군가와 함께 하는 법을 배우고 싶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내 삶이 그런 식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것들에 도전했지만 종국에는 사회생활을 하기보다는 홀로 틀어박혀 무언가를 하는 쪽을 택했다. 혼자 있는게 편한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지만, 단순히 혼자 있는 걸 좋아했다기 보다는 남과 함께하는 것을 무서워 하는 것은 삶에서 많은 가능성들을 차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 너 편할대로 혼자 살지 그랬니, 요즘에는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많은데, 라고 할 수도 있는데, 실제로 그런 선택을 많이 했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런 식으로는 돈이 일정수준 이상 벌리질 않는거다. 꼭 불가피하게 남과 같이 일을 해야 일이 좀더 순탄하게 풀리는 현상들이 이어졌는데, 사실 나는 그마저도 도망친 적이 많다. 알 수 없는, 타인에 대한 나만의 경계심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 정말 황야의 이리처럼 혼자 떠도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외로웠지만, 어느 누구도 나를 알아봐주지 않아 힘들었지만, 그럴수록 사람을 사귀기 보다는 오히려 나의 보호막을 스스로 강화해가는 편이 안전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렇게 외로운 내향인이었던 나는'내 편을 들어줄 단 한사람'을 찾아다녔다. 나를 이해해줄 단 한사람,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줄 단 한사람만 있으면 된다. 나는 그러면 세상 두려울 것이 없다. 그사람하고 단둘이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니까. 결혼생활이란게 그런 거 아닌가? 날 알아줄 단 한사람을 만나 둘의 세상에서 더없이 행복하게 살아가야지. 그런데 그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 제발 빨리 나타나줘. 외로워 죽을 것 같으니까.
그래서 20~30대에는 연애에 꽤 골몰했던 것 같다. 사실 연애란 것이 'A와 B가 만나 맞추어 나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돌아보면 나는 연애를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기 보다는 '나에게는 정해진 짝이 이미 있고,그 사람은 이미 지구상 어딘가에 있지만, 나는 단지 그 사람을 아직 찾지 못한 것 뿐이며, 우리가 만나게 되면 마치 톱니바퀴의 아귀가 완벽히 맞아 떨어지듯이 나의 모든 결핍감과 외로움, 허전함이 사라질 것이며, '내가 사랑이라 여겼던 그 사랑'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당시에는 이렇게 문장으로 정리되지가 않았고, 한참이 지난 후 내 연애 DB를 살펴보니 그랬었군...하고 다시 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저렇게 '사랑의 원형'이 정해져 있던 채로 누군가를 만났었기 때문에, 항상 연애가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와 정리가 빨랐던 것도 아니다. '그 사람'이 혹시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이 사람인가 싶어서 질척거리고 집착했던 적도 많다. 그러나 점점 나중으로 갈수록 '그 사람'의 기준이 명확하게 표면으로 떠올랐고 나는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금방 헤어짐을 택했다. 그렇게 걸러내고 보니 여전히 나는 황야의 이리 한마리였다. 여차저차한 다양한 이유로 나는 결국 혼자가 된 것이다.
사실 그렇게 되고 보니 도무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로 괴로웠었다. 너무도 외롭고, 춥고, 마음 한켠 구멍은 어떻게 해도 채워지지가 않았다. 공허하고 허무한 나날들. 무엇도 제대로 되는 것 하나 없었다. 몸도 마음도 딱히 건강하지는 못했던 시절이다. 나는 어떤 방향성으로 살아야 할까. 나를 이해해주는 단 한사람을 만나는 것이 내 삶의 목표가 아니라면? 그럼 다수와 행복하게 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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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은데? 외로워도 그건 싫은데? 사람들은 날 알아주지도 않는데?나를 오래오래 설명하기가 너무 귀찮은데?
아니, 그것보다 날 싫어할 것 같은데? 너무 무서운데 어떻게 그래?
사실 나의 경우는 '혼자 있으려는 습성'이 극대화되어서 드러난 삶이지만, 이런 모습은 또한 보편적인 모습일거라고 생각한다. 제 아무리 슈퍼 인싸의 유전자를 지닌 사람이라도 나름대로 나를 지키는, 세상과의 경계가 있다. 그리고 그 경계를 하나 허무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과의 경계라고 하는 건 아까 말한 '사랑의 원형'과도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경우는 그 '사랑의 원형'이 굉장히 강하게 박혀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은 나의 전생과, 또 영혼의 태생적인 특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이것은 기회가 되면 나중에 이야기해보겠다)
그러나 전생의 히스토리나 영혼의 히스토리는 차치하고 (사실 모두다 영혼적 존재이고 인간이기 이전의, 각자의 영혼적인 히스토리는 존재한다) 누구나 사람에게는 자신이 생각하고 기억하는 '사랑의 원형'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보다 뿌리깊다. 인간사에서 그것은 각자의 신념이나 이념,종교, 사상, 철학 등으로 표현되지만, 개인의 차원에서 보면 각자가 가진 고집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의 뿌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깊어서 본인의 영혼의 성향이 발현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각 영혼이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부터, 영혼의 삶을 살 적부터, 이 우주를 돌아다닐 때부터 갖고 있던 사랑에 대한 각자의 기억이 이 생에서도 당연히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유독 강한 존재가 있고, 덜한 존재가 있을 뿐이다.
나는 이번생의 나의 숙제가 내가 갖고 있던 '사랑의 원형'을 깨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이렇게 혼자 지내기도 어려웠다. 나 자신이 아닌 외부 세계가 너무도 두려웠기 때문이다. 평생 이런 두려움 속에서 꽁꽁 숨어 지내는 것에 물론 편안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말했듯 편안함보다는 불편함이 훨씬 더 커지고 있었다. 나는 두려움으로 칠갑을 두른 나의 경계를 깨고 한걸음 밖으로 나아가야 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나의 목표치에 어느정도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현재 타인에 대해 느끼는 예전 같은 두려움은 어느정도 넘어선 것 같다. 현재의 나는 대부분의 경우 누구와도 지내기가 어렵지가 않다. 대부분 평안하다.
내 영혼의 가이드를 따라
어떻게 나아갔느냐고? 여러 방법론들이 있지만, 사실 그것들을 각자에게 적용하기란 무리가 있을 것 같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고 처한 상황도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내 영혼이 원하는 삶의 방향을 따랐다
내가 삶을 다시 잡아가기 전까지 내가 문장으로 뱉을 수 있었던 말은, '잘은 모르겠지만 좀 행복했으면 좋겠어. 지금보다 마음이 편안했으면 좋겠어' 정도의 문장들이었던 것 같다. 그 문장에 어쩌면 내가 가장 원하는 것들이 다 담겨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원을 세우자 그렇게 갈 수 있는 많은 사건들이 내 앞에 창조되었다.
다만 여러분들께 하나 강조드리고 싶은 것은, 그 과정 속에서, 인간사에서 결코 행복처럼 느껴지지 않는 사건들도 많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순간들 역시, 인간의 삶이라는 시야 속에서 '이건 불행이야'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물론 당연히 그렇게 생각한 적이 많다- 사고의 방향을 '이건 내가 더 큰 한걸음을 나아가기 위해 마주한 내가 만든 사건들이다'라고 생각하려고 애를 썼다. 애를 쓰다 보니 습관이 되었고, 해서 요즘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런 식으로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사실 '내 영혼'이라고 하면 나 자신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자기자신의 영혼과의 싱크로율이 그렇게 높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영혼과의 교감을 통해 무언가를 결정하기 보다는 인간사의 법칙 안에서 무언가를 더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이 많다. 인간사에서 이득처럼 보이는 일이 때로 영혼적인 목표성 안에서는 후퇴인 때도 많이 있다. 반대로, 때로 인간사에서는 손해처럼 보이는 일들이, 한 영혼에게는 큰 성장의 기반이 되는 때도 많이 있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영혼과 인간의식의 시야의 차이를 보여준다.
자신의 영혼과 인간의식(비슷한 개념으로 '에고'라는 단어가 있다)의 관계는 마치 흐르는 강물과 그 위에 떠 있는 배와 같다. 강물이 흐르는 방향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영혼이 가진 목표성이자 방향성이다. 그 위에 배가 떠 있는데, 목표 지점까지 빠르게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강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노를 저으면 아주 쉽고 수월하게 갈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판단의 기준을 알게 되고, 이것이 맞다더라, 저래야 하지, 하면서 오락가락 하곤 하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뭔가 아닌 것 같은데도 두려운 마음에 기존에 해 왔던 선택들을 계속 하게 된다. 자신의 영혼이 육체가 있는 자신의 자아를 인도하고자 하는 방향이 있으나, 인간적인 시야에 갇혀 그 뜻을 온전히 해석하지 못하면 본인이 가고자 하는 길에 계속 딜레이가 생기기 쉽다. 마치 강물의 흐름을 역행해서 노를 저어야 하는 것 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과연 영혼이 가고자 하는 방향은 무엇일까?했을때는, 아마도 행복일 것이다. 그 행복이라는 것은 내 마음의 속박과 두려움이 덜한 방향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 영혼들은 본인의 두려움을 깬, 속박을 깬 자유로움으로 향하고자 한다.
보통 자신의 두려움은 자기 자신인 경우가 많다. 지금까지 나를 생존하게 하고 보호해주었던 강한 틀과 신념은 어느 시점이 되면 되려 '나'라는 틀을 견고하게 만들고 새로움으로 나아가기를 어렵게 한다. 나는 지금까지 그 신념 안에서 안전했으므로 그것을 깨고 나가기는 너무도 두려울 수 있다. 그러나 그 틀이 견고할수록 나는 강한 극단성을 지니게 된다. 강한 극단성은 삶에서 강한 반동으로서 나에게 역풍으로 다가온다. 강한 역풍을 맞으면 또 다른 반대의 극단을 만들어내기가 쉽다.
사실 우리들 대부분이 이렇게 양극단 안에서 오락가락 하면서 현생과 전생을 살아왔다. 지구에서 통용되는 모든 개념들이 이분법적인 시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는 이제는 그 이상으로 향하기를 바랄것이다. 양 극을 못 벗어나고 오락가락 하는 삶이야말로 굴레이기 때문이다. 그 이상으로 향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다양하게 각자의 두려움을 마주하게 될 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 사고의 근간은 적어도 지구에서는 상식이며 법칙이었기 때문에, 그 너머로 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오랜 관성을 버려야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많은 지구의 사람들이 겪는 문제이고, 또 혼자의 문제가 아니기에 혹여나 그런 어려움에 봉착하더라도 너무 막막하거나 혼자만의 고민이라고 외로워하시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영혼이라고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영혼들이 원하는 방향성이 '자신의 속박을 깬 자유로부터 비롯된 행복감'이라고 알았다고 치고, 자신의 영혼과 교감하게 되었다고 쳐도 뭔가 확 해결되지는 않을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영적인 각성 하면 만화 캐릭터가 각성하듯이 일순간에 구오오오...하는 과정을 겪고 위대하고 비범한 능력치를 얻는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대부분 지구에 도착한 영혼들은 한두개씩 자신의 숙제가 다 있다. 그러니까, 이 지구라는 공간에서 좀더 생생하게 체험을 하면서 자신의 숙제를 해결해나가는 것이다. 그것을 카르마라고도 표현하고, 어떤 사람들은 죄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나는 '숙제'라는 표현을 가장 선호한다.
특히 '죄'라는 표현에는 이미 이분법적인 가치관이 강하게 반영된 단어라서 별로 쓰고싶지는 않다.(고백하자면 아주 오랫동안 그 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했기도 했다) 어쨌거나 숙제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과 싱크로율이 올라가면 자신이 풀고 싶던 숙제에 대해서 좀더 명확하게 알 수 있고, 사실 싱크로가 그다지 높지 않더라도 삶에 드러난 문제들로서 자신의 한계는 잘 파악할 수 있다.
사실 '너 하고싶은 대로 해라' '영혼의 끌림대로 해라'라고 했을때 잘 보아야 할 지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인간의 삶을 살면서는 그저 이끌림대로 살아가는 그 자체가 큰 도전일 수 있다. 때로 영혼의 이끌림에 때라 인간사에서 이득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반하는 것을 결정하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부터가 시작이라고 본다. 그때부터 자신도 잘 몰랐던, 자신이 깊이 감추어왔던 영혼의 본 모습이 드러날 수 있고, 사실 자신이 스스로 파악했던 자신의 숙제와 정반대이거나 전혀 다른 모습이 드러나게 될 수도 있다. (나도 내가 아는 나와 다른 나를 많이 발견해서 깜짝 놀란 것이 여러 번이다) 그렇게 드러난 모습들을 자기가 큰 용기를 내서 내린 결정이라고 해서, '나는 영혼의 이끌림을 따랐으니 이게 정답이야'라고 단정지어버리면 영혼이 원래 갖고 있던 숙제나 오류를 반복할 가능성이 크다.
그보다는 새로이 발현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 '아 나는 이제 나의 본모습을 제대로 알아가는구나, 이제부터 시작이다'란 마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고 다음 해법을 찾아가보는 점검을 한번 해 보기를 추천한다.
일반화될 우려가 있어서 구체적인 예시는 잘 들지 않지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이번 생에 자신을 하고픈 말도 못하는 쭈구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다. 항상 자신이 없었는데, 그 존재가 현재 이런 모습을 띄고 있는 것은 애초에 전생의 어느 시점에 너무 과도한 자기 표현으로 살다 보니 역풍을 맞게 되었고, 거기에 대한 보완을 해보고자 현재 우물쭈물 하며 조심하는 삶을 선택했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 존재는 아마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온전히 알고, 그것을 타인과 함께 하는 삶 속에서도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표현하는 삶'을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 존재가 원하는 중심이었겠지만 아직 거기에 다다르지 못하고 오락가락의 삶을 반복한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마구 표현하는 극단성도 내재되어 있고, 만약 영혼이 이 모습을 극복하고 싶다면 이를 드러내는 삶의 계획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극단성을 인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자기 인정은 변화의 첫 단추이고 말이다.
해서 내가 어느정도 용기를 내서 직관을 따르는 삶, 이끌림을 따르는 삶을 살게 되었더라도, 자신을 돌아보며, 내가 '원하는 자유에 이르렀는가'를 계속 살펴보기를 추천한다. 당신이 그것을 진정 원했다면 모로 가도 결국에 당신이 원하는 자유에 이를 것이다.
세상이 문득 친근하게 느껴진다
사실 위에 설명한 과정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두려움을 마주하는 과정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마냥 편하고 즐겁기만 하지는 않았다. 상당히 치열하고 (겉으로는 별일 없는 거 같아도) 격렬한 에너지 정리의 나날들이었다. 사실 현재도 그것에 대해서는 멈추지 않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그만큼의 격렬한 노선은 아닌 상태다.
그 와중에 나는 나의 외로움과 마주해야 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도 마주해야 했다. 아니, 사실은 나는 황야의 이리였고, 지금도 황야의 이리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은 굶주린 황야의 이리가 세상으로부터 느낄 법한 두려움보다는, 뜯어먹을 풀과 마실 물이 가득한 초원에서 뛰노는 한마리 초식동물이 세상으로부터 느끼는 친근한 감정이 더 강하다. 실상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겠는가. 단지 내가 세상을 지각하는 인식이 달라진 것이다.
그저 '세상은 따뜻한 것이니 마음을 고쳐먹어라' 같은 문장으로 세상에 대한 경계심이 사라지기란 어렵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오랜 습을 깨고 한걸음 더 자유로움으로 나오기를 원했기 때문'에 내가 비로소 세상에 대해 이런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현실적 조건이 예전보다 크게 좋아진 것도 아니다. 어쩌면 인간적으로는 현재 위기에 몰린 듯 보이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시기, 두려움 이면에 나의 영혼이 왜 이런 삶을 창조했는지 살펴보고 내 삶을 이해했을 때 나에게는 더 큰 자유가 찾아왔었다.
요즈음은 산책을 자주 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10월의 가을 하늘은 높고 맑았다. 여름의 극심한 더위 때문인지 10월의 선선함이 축복처럼 느껴진다. 나는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혼자 살고 있다. 여전히 혼자이지만, 또 혼자가 아니기도 하다. 지난 몇년 간 고향이 아닌 이 곳이 막막하고 낯설고 삭막하다 느끼며, 그래서 무섬증을 느끼며 살았던 것 같다. 같은 곳인데 이제는 삭막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내 고향이 아니라도, 내 친구가 아니라도, 내가 생각했던 '사랑의 원형'에 부합하는 사람이 아닌 사람과도 나는 낯설지 않게, 친구가 될 수 있고,나눌 수 있고, 받을 수도 있다. 나는 확실히 전보다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