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내 삶은 내 생각대로 만들어진다''내 삶은 내가 만들어간다'라는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그런데 그렇게 치자면 사실 남 탓 할 일이 없어지지 않나? 다 내가 만든 일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 탓 할 일이 너무도 많고, "쟤 때문에 그랬어" 혹은 "어떤 상황 때문에 그랬어"하고 나도모르게 말하는 때가 너무 자주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런 말을 이제는 어린 때 만큼 많이 하지는 않는다. 외부적인 요건에 흔들릴 일이 그만큼 줄었기도 했고, 설령 속으로는 '아 쟤 때문에, 아니면 어떤 상황 때문에 불가피하게....할수 없이...'하는 마음이 들었더라도 그 생각을 말로 뱉는 경우는 줄어들었다. 진짜로 쟤네 탓이라고 생각 안해서가 아니라, 그런 말을 하면 좀 없어 보인다는걸 알기 때문에 원만한 사회 생활을 위해서 조금은 가식을 떤 것이랄까.
그런데 어느 날부터, 정말 저대로 삶에 적용해보기로 했다. 뭐랄까, 좋은 일이 생기면 내 탓이고, 억울한 일이 생기면 니 탓을 하게 되는게 너무도 모순같았기 때문이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삶에서 펼쳐지는 일은 다 내 창조물인거다.
설령 그것이 안 좋은 일이고, 납득이 안 가고, 억울할지라도."
왜냐하면 남 탓 해봐야 답을 찾을 수 없던 때가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정말로 그렇게 살아보았다. 여기에는 약간의 시행착오가 있었는데, 저렇게 하기로 결심하고 처음 몇 년 동안은 무슨 일이 터지면 다 내 탓으로 돌려버렸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 보니 진짜로 더 억울해지는, 불필요한 일들이 발생해버리는 것이었다. 물론 니탓이니 내탓이니 옥신각신 할 필요가 없었으니 많은 일들이 스무스하게 풀린 부분도 있지만 마치 스스로를 맨날 문제만 일으키는 죄인처럼 만들어갔달까. 사실은 억울해죽겠는데 아닌 척 하고 사는 느낌도 들었었달까. 이건 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멈춰야지. 이렇게 죄인모드로, 모든걸 내 탓으로 돌리고 살다가는 나는 평생 남한테 읍소할 일들만 만들면서 살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나의 대전제로 치자면 모든 일들은 또한 내 생각과 에너지로부터 발현되니까 말이다.
그래서 한끗 차이로 생각을 달리 해서 삶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바로
'내 앞에 펼쳐진 일은 내 생각과 에너지를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이라는 거다. 사실 '내 삶에서 펼쳐지는 일은 다 내 창조물이다'와 같은 의미의 문장이기는 하지만, '거울'이라는 표현이 네탓인지, 내 탓인지의 사고의 굴레에서 빠져나오게 해 주었다.
최근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한 고객이 별 것도 아닌 걸로 너무 심하게 물고 늘어지는 거였다. 나의 업무와 관련된 것이었는데, 그분은 A부터 Z까지 샅샅이 물고 늘어지면서 일파만파 일을 키우겠노라 난리를 부리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사람의 근본됨까지 확대 해석하며 파고드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일로 직장을 옮겨야 했다. 그 일을 몇 달이나 겪었어야 했는데, 이 때의 나의 억울함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 아무리 거울모드를 작동해보려고 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망할 놈의 거울 모드. 이렇게 개 빡이 치고 억울한데 저 진상과 대체 무슨 거울 모드가 된단 말인가? 그냥 저 사람이 이상한 사람인데??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렇게 큰 이벤트는 뭔가 메세지가 있다. 나는 이걸 깨달아야 한다. 찾아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 또 똑같은 걸 안 겪게 될 것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해서 억울함을 억누르고 거울모드를 일단 작동시켜 보았다. 눈을 감고 명상을 참 많이도 했다. 걸으면서도 생각했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을까. 어디서부터가 잘못인가.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그 고객과 내가 판박이처럼 닮은 부분이 있었다. 바로, '어떤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해서 샅샅이 파고드는 것, 그것을 들추어 내는 것,무결함에 집착하는 것, 결국 그것으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되는 것' 이었다.
세상 일이라고 하는 것이, 문제를 삼자고 들면 문제처럼 보이는 것이 한 두개가 아니고, 사실 융통성을 좀 발휘하면 더 큰 것들을 아우를 수 있는 때가 많이 있다. 내가 일했던 곳에서는 나름의 엄격한 시스템이 있었는데,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이라서 사람들이 최대한 융통성을 발휘해 현장의 다양한 변수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융통성이라고 하는 것이 어느 정도를 벗어나면 체계 자체를 위협하는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내 경우에는 그 융통성이라고 하는 게 너무 과하게 적용되는 게 아닌가, 규칙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나름의 걱정 내지는 불만이 마음 깊은 곳에는 강하게 있었던 것 같다.(당시에는 그런 불만을 내가 갖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렇지만 살면서 내가 어떤 틀을 그악스럽게 들이밀었던 적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래서 적도 많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당위성이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나의 논리는, 대부분이 사람들이 맞다고 칭하는 도덕관념 같은 것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약간 요즘에 유명인들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거나 하면 굉장히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면서 그 사람의 근본됨까지 공격하는 댓글들이 많이 보이는데, 나도 그런 부류였던 것 같다. 좀 폭력적인 도덕성?이랄까? 그냥 나는 그 역풍을 그대로 맞은 것에 불과하다. 내 강한 신념, 강한 잣대가 만든 반작용을 나도 그냥 그대로 맞은 것 뿐이었다.
하나의 강한 신념은 필연적으로 강한 반동을 낳는다. 이번 일을 통해 내가 적지 않게 놀랐던 이유는 나는 그동안 많은 사건들을 통해 내가 많이 유연해졌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거의 마스터해서 정말로 유연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예전같으면 마음에 안 들면 바로 반발이 튀어나가곤 했는데, 지금은 딱히 별 생각도 들지 않는 때가 많았어서 나는 내가 정말로 그런 사람이 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한달..두달동안 깊이 생각하고 명상하고 (물론 울기도 많이 울었음) 되새김질을 해 본 결과...내 의식의 깊고 깊은 곳에는 여전히 옳고 그름에 대한 아주아주 강력한 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람만큼 나도 지독했다. 아직도.
사실 거울모드가 어려운 지점은 바로 이런 부분이 아닐까 싶다. 내가 미처 스스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던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부분이 내 삶에서 어떤 사건으로 드러날 때, 너무도 당혹스럽고 더더욱 억울하기 짝이 없게 느껴지게 되고, 대부분 그런 순간에 상대방 탓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주어지는 것 같다.
내가 앞서 겪었던 사건의 경우는 나와 비슷한 접점을 찾아낼 수가 있었지만, 사실 또 자주 발생하는 것이 정반대의 사람과 겪는 갈등이기도 하다. 이런 경우에는 정말이지 나의 경우와는 정반대라서 거울모드를 적용하기가 너무도 어렵다. 그러나 그 역시도,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를 적용해보면 쉽게 풀리는 때가 많았다. 대부분 그런 때는 내가 맞니, 네가 맞니 하면서 싸우기가 쉬운데 그것을 팩트적으로만 다다다 들이밀면 싸움에서 끝나기가 쉽지만, 보다 큰 틀에서, "너와 나의 강한 틀이 있구나.너는 됐고 일단 나의 강한 틀을 허물어보겠다."라고 마음먹고 노력하면 실제 많은 일들이 부드럽게 끌러진다. 나의 강한 틀이 약화되면 그만큼 반작용도 줄어들기 때문에 그런 일을 덜 창조하게 되는 거다.
한편으로는, 나와 정반대인 듯 보이는 사람과의 갈등이 또 전혀 반대인 것만은 아닌 경우도 많다. 이것도 작용과 반작용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사실 여기에는 약간의 생소하지만 익숙한(?) 개념이 추가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은 전생을 믿으시나요?(급 존댓말) 나는 믿는다. 믿고 안믿고의 문제가 아니고 전생은 실존하며, 사실 나는 현생도 지난 생에서 못 다한 숙제들을 해결하는 리듬으로 살아가고 있다.현생과 관련해서 꼭 필요한 전생의 몇가지 정보들도 떠오르거나 알게 되었고 말이다. (전생을 꼭 알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여러분의 이번 생에 필요한 정보라면 전생의 정보들도 필요한 때 알게 되실거라 믿는다)
한 생 안에서 비교적 평탄하게 한가지 캐릭터로 살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살면서 여러 곡절을 겪으면서 원래의 타고난 성격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며 타고남을 보완하려는 모습들을 많이 볼 수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보완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정반대의 극단으로 가 버리는 경우도 자주 있다. 예를 들면 세상 착하게만 살던 사람이 세파에 시달리다 복수심에 흑화하여 나중에는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보다 더 독한 자가 되어버리는 클리셰를 영화에서도 많이 보는 것처럼 말이다. 너무 착하기만 한 사람이 세파에 시달리는 것도 반작용이고, 범죄자가 벌을 받게 되는 것도 사실은 반작용이다. 한마디로 강한 극단은 필연적으로 반대의 극단을 내포하고 있다는 거다. 마치 스프링을 강하게 눌렀다 놓으면 반대 방향으로 팍 튀어오르는 것 처럼 말이다.
인간의 삶 속에서는 착함/악함의 기준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지만, 단순히 영혼의 에너지 측면으로 해석해본다면 극단이 만들어 낸 반동 안에서 오락가락하며 산다고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전생을,윤회를 믿는다고 했다. 그럼 이렇게 이쪽 반동으로 갔다가 어떤 부작용을 겪고 다시 저쪽 반대편으로 갔다가, 또 반동으로 이쪽으로 오는, 그런 오락가락 반동의 삶을 여러번 겪었다고 치자. 그럼 그게 다 내 모습인거다. 비록 현생에서는 내가 이쪽 편의 성격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전 생에서 살았던 저쪽 편의 성격을 보완하기 위한 영혼의 계획 때문에 이쪽 편의 성격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일 뿐, 나는 저쪽 편의 성격도 내포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와 정 반대인 성격의 어떤 존재와 심각하게 갈등을 겪고 있을때는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는
1.이것은 서로의 강한 신념의 충돌일 뿐이다. 그 '강함'의 절대값이 같아서 서로 붙어있는거다. 상대방이 그 강한 신념을 꺾는 것은 상대방의 자유의지이니 내가 강요할 수는 없고, 적어도 내 강한 틀을 내려놓으면 내 유연해진 에너지로서 내 앞에는 다른 삶이 펼쳐질 수 있다.
2. '정반대라서 이해가 안된다'기 보다는 '저 모습도 나에게 내포되어있을 수 있다' 고 생각해보면 많은 갈등 상황을 줄일 수 있었다.
물론 잘 안되고 어렵다. 무척 생소한 개념이기도 하다. 솔직히 나도 잘 안되었고 습관을 들이려고 노력을 했다. 그래도 잘 안되었다. 솔직히 거울모드를 적용해야 하는 때는 이성으로 통제가 안될 정도로, 소위 '발작버튼'이 눌리는 경우들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