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으로 산 여자

by 안태현

영국 왕실을 70년 동안 지키던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했습니다. 향년 96세의 나이입니다. 코드명 ‘런던 브릿지 이즈 다운’이 실제가 되어버린 겁니다. 벌써부터 영국은 버킹엄 궁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엘리자베스 2세를 추모하고 있습니다.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는 임기 이틀 만에 여왕의 장례식을 총괄하게 됐으며, 찰스 3세는 73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깐 이건 ‘엘리자베스 2세’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의 이야기를 써보고자 합니다. 조지 6세의 장녀로 태어나, 25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아야 했던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어린 시절부터 왕위 계승 서열을 외우고 다녔다고는 합니다. 이미 그때부터 자신이 짊어져야 했던 큰 짐을 알고 있었던 거지요. 이후 1945년에는 18살의 나이로 영국군 여군 부대에 자진입대하며, 왕위 계승을 받게 되는 1952년까지 복무를 이어갑니다.


그 사이 1947년에는 필립 공과 결혼해, 이듬해 찰스 3세를 낳았습니다. 이후 슬하에는 장녀 앤과 아들 앤드루, 에드워드를 두기도 했습니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자식들에게 여느 부모처럼 사랑을 많이 주지 못해 미안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삶들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70년 동안 영국의 가장 큰 어른으로서 살아와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엘리자베스의 사적인 영역을 들여다봤던 때도 있었습니다. 찰스 3세의 전처 다이애나 스펜서와의 일화 때문입니다. 찰스 3세가 불륜을 하고 있을 때에도, 엘리자베스는 늘 앞에서만 의무적으로 다이애나를 위로했을 뿐 찰스 3세의 불륜을 방관했습니다. 또한 다이애나와 찰스 3세의 관계가 뒤틀린 때에는 그저 자신과 다른 성격의 다이애나를 못마땅하게 여길 뿐이었죠. 어린 시절부터 영국을 지탱해야 했던 엘리자베스와 조금 더 표현이 직설적이었던 다이애나의 대립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다이애나의 죽음 뒤, 영국 왕실은 서서히 변화의 길을 맞습니다. 어쩌면 엘리자베스의 변화라고 말하는 게 맞겠죠. 특히 지난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엘리자베스는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와 함께 헬기에서 뛰어내리는 과감한 퍼포먼스(당연히 스턴트맨입니다)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영국의 왕이 이런 퍼포먼스를 보여주다니. 보수적이던 왕실이 서서히 문을 열어가는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지난해 남편 필립 공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엘리자베스 홀로 세인트 조지 성당에 앉아 있는 모습이 찍힌 사진은 세간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평생을 함께 했던 사람이 곁에서 떠나갔을 때, 그녀가 보인 모습은 여왕이 아닌 인간 엘리자베스의 삶을 조심스럽게 엿볼 수 있게 했습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더 크라운>은 이런 엘리자베스의 삶을 깊고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극적으로 풀어내면서 사실과 다른 이야기가 그려지기도 했지만, 여왕보다 인간 엘리자베스에 더욱 집중해내면서 많은 호평을 받았습니다. 한번쯤 봐도 좋을 시리즈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앞으로도 ‘여왕 엘리자베스 2세’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기억할 겁니다. 하지만 업적이 아닌 인간 엘리자베스를 기억하는 일도 있으면 합니다. 저는 오늘 96년의 시간 동안 왕실이라는 보수적인 환경에서, 한 인간의 삶보다 왕족으로서의 삶을 우선하며 살아와야 했던 엘리자베스를 기억하려 합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사진) 영국 왕실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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