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서점알바 11화

시절 인연

by 수경

한 해의 마감은 늘 어려운 문제다. 어릴 때는 방송대상이나 가요대상을 보면서 한 해를 보냈다. 젊은 시절에는 통음이나 해넘이와 해돋이로 길바닥에서 보냈기도 했다. ‘돌아와 거울 앞에서 선’ 나이인지라 이제는 못한다. 언제부턴가 집에 널린 책들을 정리하고 책상에 쌓인 것들을 치우고 최고의 책을 뽑는 놀이를 한다. 그마저도 올해는 벅차다. 하는 일 없이 소득도 없이 바쁜 나날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해가 가기 전에 이것이라도 해야 한다!


가난한 살림이 문제인지 욕심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만(사실 둘이 결합된 문제다!), 서울살이 후 나의 책들은 서가에 꽂히지 못하고 바닥으로부터 곳곳에 쌓여 있다. 찾기도 다시 꺼내기도 힘든 지경이다. 서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책을 더 많이 산다고는 할 수 없다. 알라딘에서 덜 사고 서점에서 사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주 구입처가 바뀐 탓에 2023년 나의 탁상달력은 알라딘 달력이 아닐 예정이다. 얼마만의 일인가. 오호통재라!

대략 칠팔십 권쯤 사고, 그보다 덜 읽는다. 아예 읽지 못하고 해를 넘기는 책들도 있어서 늘 죄책감에 쫓긴다. 사람 사이에도 시절 인연이 있지만 책은 더욱 그렇다. 요모조모 합이 잘 맞아야 책을 온전히 만날 수 있다. 사진 속의 책들은 올 한 해 내가 좋게 읽은 책이고, 최고의 책도 있을 것이다. 노서경 선생의 <의회의 조레스 당의 조레스 노동자의 조레스>은 서점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읽지 않았을 책이다. 편견이라는 것도 알고 늙어가면서 할 이야기도 아니지만, 나는 늙어서 좋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이 들수록 인간은 모든 면에서 나빠진다! 일면식이 없던 선생은 참 괜찮으셨다. 물론 ‘조레스’라는 인물이 매력적이었고, 그를 둘러싼 시대와 사회도 역동적이고, 그것을 풀어내는 선생의 필치도 좋았다. 저자와의 대화는 책의 모든 것을 휘감은 은은한 차향 같았다.

<소요서평>을 쓰려고 읽었던 책들도 있고, <신간읽기모임>에서 함께 읽었던 책들도 있다. 연구소 공부모임에서 읽었던 책도 있다. 이래저래 올해는 서점과 관련된 책들이 어쩔 수없이 많다. 내 맘대로이지만 그 선정은 늘 쉽지 않다. 아마, 단 한 권을 선정해야 한다면, 그 저자의 책을 가장 먼저 집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읽은 저자의 책은 누군가에게 아주 좋다고 하기가 좀 부끄럽다. 텍스트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쓰는지 그의 글을 많이 읽어서 아는 까닭이다. 도저히 엄두 나지 않은 태도의 글쓰기다. 대신 다른 저자를 2023년의 모범으로 삼겠다. 그처럼 보고 그처럼 쓰기! 물론 이 의지가 얼마나 실현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새해니깐 의지를 세워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어제오늘은 오랜 시간 책을 고르는 손님이 있었다. 사뿐하나 바쁘게 서점을 오가며 신중했다. 책마다 다른 색깔의 책갈피를 꽂으며 계산했더니 고맙다며 말했다. “해가 가는데 책을 거의 안 읽었더라고요. 그래서 얼마 남진 않았지만 일단 사야겠다 싶어서요.” “사두면 읽게 되지요.” 손님의 해넘이, 해맞이 의식을 기원하는 마음이었다. 버릇으로, 호기심으로, 그리고 덜 나빠지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읽겠다. 시절 인연으로 내게 오는 책들을! 새해에도 모두 모두 좋은 인연 많이 만나기를…!

“책의 물질적인 가치는 출판사나 경매소에서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가치는 인간과 맺는 관계를 통해 획득된다.”(부르크하르트 슈피넨, 책에 바침, 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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