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
‘나’는 무언가 기억해 내려 하지만 갖은 이유들로 실패한다. 그저 망망대해 위 작은 노를 저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말을 건네는 햇살 한 줄기.
부드럽고 가벼운 바람의 결들이 나의 몸을 곳곳이 스치며 지나간다. 빽빽한 들판의 완연한 초록의 풀들이 바람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추고, 지평선 그 끝엔 흐릿한 무언가 가 즐비해 있다. 해는 중천에 서서 내 눈을 부시게도 하고 몸에 따뜻하게 안착하기도 한다. 지평선 끝 아스라이 먼 곳에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향해 걷고 또 걷는다.
경쾌하고 듣기 좋은 자명소리에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속으로 크고 작은 한숨소리를 연발하며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이내 욕실 앞에 서서 잠옷과 속옷을 벗어 놓고, 퉁퉁 부은 얼굴과 반 만 겨우 뜬 눈으로 몸을 씻어내기 시작한다. 잠을 잘 잔 건지 설친 건지 알아내기 위해 잠시 몸의 감각을 곤두세워 보지만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을 먼저 기억해 내고서는 빠르게 마무리를 하고 몸을 말린다. 그리고 몇 안 되는 좋아하는 옷 들 사이에서 입을 옷을 신중하고 재빠르게 골라낸다. 가방엔 이동 중에 읽을 책을 챙기고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집 밖을 나선다.
첫 번째로는 쇼팽의 녹턴 2번을 귀에 꽂고 두 번째로는 하늘의 색을 살핀다. 언제부터 인지는 모르겠지만 몸이 반응하는 루틴 비슷한 것이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버스정거장에 도착하자마자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조금의 이질감이 느껴졌다. 물론 종종 시간을 맞추는 버스였지만 “거의 처음이지 않았나?”라는 혼잣말을 작은 한숨처럼 뱉고서 가장 앞자리에 앉았다.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꺼내어 읽는다. 녹턴 8번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렇게 십여 분쯤을 지나다 보면 한 눈에 보아도 힘을 잃은 것 같아 보이는 냇가가 하나 보인다. 그곳에서 잠시 눈길을 둔다. 그리고 나는 과거의 그곳을 상상한다. 물 수위가 높아 위험했을지도 모르지만 수많은 생명들이 넘쳐나는 그곳을 그린다. 제 멋대로 물이 가득 차 있는 그 물 길 위에 나룻배를 하나 띄어 놓고 마구 쓸려 가는 상상을 해본다. 물 길 양 옆에는 느티나무가 끝없이 놓여 있다. 바람에 따라 쏴아아- 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히고 나는 그것들을 전부 마음속에 그려 놓는다. 크기, 색, 질감, 움직임, 소리 그리고 아픔과 상처, 희망까지. 나는 깊은 호흡을 몇 차례 반복하고서 출근을 한다.
나의 일터는 조금은 소박한 크기의 전통이 있는 밥집이다. 기술을 배워 대를 이어 나갈 수 있는 밥집을 하고 싶기에 오랫동안 나의 입에 따뜻한 정과 행복을 채워주었던 곳에 찾아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지 물으며 간솔하게 이유를 설명했다. 얼굴에 따뜻함이 가득한(이 말을 제외하곤 설명할 길이 없다.) 가게 주인은 따뜻한 웃음과 함께 흔쾌히 승낙을 해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매일 감사한 마음으로 안주방의 바닥 타일을 기다랗고 빳빳한 솔로 박박 씻어내며, 무거운 철제 통을 이리저리 옮기기도 한다. 칼질은 독학으로 익숙했던 터라 비교적 힘을 덜 들이며 할 수 있었다.
한창 재료를 썰어내는 도중 가게 주인이 말을 건넸다.
“일을 시작 한지 얼마나 되었지?”
나는 잠시 고민 후 대답했다.
“다음 달 10일이면 만 2년이네요.”
“벌써 2년이 되어 간다는 말이지? 혹시 오늘 저녁 장사 후에 시간 좀 내줄 수 있나?” 아주 예의를 갖추며 내게 물었다.
“물론이죠. 그렇다면 가게 정리를 마치고 그곳인가요?”
“물론이지. 아니면 가보고 싶은 곳이 있나?”
“그럴 리가요.”
다시금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의 연장선이었다. 하지만 문득 아침에 잠을 잘 잤는지 설쳤는지에 대한 의문이 떠올랐고, 다시 한번 감각을 세워 기억해 내려는 그 순간 첫 손님의 입장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순식간에 가게 안은 만석이 된다. 여기저기서 식기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리고 사람들의 식사 소리 그리고 대화 소리가 곳곳에서 섞여 내 귀로 돌아온다. 가끔은 손님들의 대화를 의도치 않게 엿듣게 되는데, 그것은 내가 죽기 직전까지도 알 수 없는 대상의 뒷이야기이다. 누군가가 무얼 샀고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그들의 관계는 사실 어떠했는지 등. 알고 싶지 않지만 알 수밖에 없는. 하지만 내가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대상들의 이야기들. 참 기묘하다. 그렇게 해가 중천을 지나 여러 그릇들을 꼼꼼히 닦아내고 뽀드득 소리가 나는지 점검도 한다.
가게 주인이 녹차를 한 잔 건넨다.
“요새 몸이 영 예전 같지가 않은 모양이야.”
나는 녹차를 건네받고 목례와 동시에 눈 사이 미간을 아주 희미하게 찌푸리며 대답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 이세요?”
”말 그대로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이야기야. 아침에 10분씩 늦게 일어나기도 하고, 어제는 집에 갈 때 맥주를 사는 것도 잊었어. “
나는 조금 익살스럽게.
”맥주는 조금 놀랍네요. 하지만 제가 보기엔 아주 정정해 보이십니다.”
“그건 그렇고 요새 그림은 안 그리는 것이야?”
“예, 요새 손이 잘 가질 않네요. “
가게 주인은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그렇게 침묵 속에 익숙하고 분주한 움직임들로 저녁 장사를 준비하였다. 저녁엔 반주를 하거나 안주류의 음식과 꽤나 거한 술상도 있어서 마음을 더 단단히 먹어야 한다. 큰 사건들은 거의 없지만 종종 가게 입장이 난처한 상황들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의 저녁은 단골들로 가득 채워졌다. 그제야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으며 서로에게 따뜻한 인사를 주고받으며 저녁 장사가 시작되었다. 가게 주인은 곳곳에 자리를 옮기며 술잔을 잠시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고 나를 향해 따뜻한 미소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