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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국화 Oct 02. 2024

토해내다

1. 나

“저에 대한 의심을 가지지 않으셨어요. 큰소리를 내신 적도 없습니다. 정말 따뜻한 음성과 멜로디로 말씀해 주셨어요. “손주”라고 불러 주시는 두 글자에 세상에 모든 오물들은 다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럴 때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어요. 할머니의 거칠고 따뜻한 손을 잡고 시골길을 걷고 있으면 요. 제 마음속엔 온갖 파랑, 초록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 눈은요...”  


할머니를 선명하게 떠올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울컥해졌다.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싶어 졌다. 할머니의 눈을 깊게 들여다보고 싶어 졌다. 그리고 따뜻한 품에 안겨 엉엉 울고 싶어 졌다.  


“할머니의 눈은요… 저에게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내가 있으니 넌 안전해.” 하고 말씀해 주시는 것 같았어요. “넌 아무 걱정 말고 하고 싶은 것을 하렴.” 이런 이야기들이요. 사실 저는 겁이 많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무얼 해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말씀해 주신 것처럼 세상이 너무 빠르게 느껴집니다. 저조차도 따라갈 재간이 없어요. 저는 느리기도 하지만 게으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런 것 들에 대해서 너무 야박하죠. 그래서 저는 세상의 속도에 맞추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정말 이상하다. 꽤나 오래 꾹꾹 감추어 놓았던 이야기들을 왜 이리도 술술 뱉는지 의문이다. 하지만 속이 시원했다. 상처를 오랫동안 압박했던 붕대를 풀어낸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하루 종일 의문을 품었던 잠을 잘 잔 것인지, 아닌지의 대한 생각이 떠 올랐다. 꿈을 꾸었던 것이다. 어디론 가 터 벅 터 벅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는데 그 기분이 명확히 설명하기가 어렵게 느껴진다. 설렘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면서 한 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했다. 그 이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리고 가게 주인이 입을 열었다.  

“좋은 분 이셔, 할머니를 많이 닮은 것 같구나. 영향을 많이 받았겠어. 지금 너에게 전하는 이야기가 주제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두 잔의 술잔을 채우며 말을 이어 나간다. 

“두려움이나 걱정은 말이다.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고 계획한 대로, 뜻한 대로 흘러갈 수 없는 일들 투성 아니겠나. 그런 것 들을 보호해 주던 할머니가 더 이상 곁에 없으니 더욱 불안하겠지. 이제는 스스로 일어날 시간이 온 것 같구나. 너는 이미 크고 강하다. 이로운 가르침을 얻은 거지. 오늘같이 언제든 꺼낼 수 있는 가르침을 너의 방패와 무기로 삼는 것이야. 할머니께서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말이다. 내 생각엔 너로서 살아가라는 말인 것 같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야. 너를 세우는 것도, 무너트리는 것 또한 너 자신이다. 오랜 전통을 이어 나갈 수 있는 식당을 운영할 것 인지, 아직 아른거리는 너의 붓을 다시 꼭 쥐여낼 것 인지 선택을 하는 것이 어떻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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