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수정같이 맑은 사랑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오롯이 피어난 아름다운 한 송이 사랑의 꽃이었다.
깊은 산 마을에 나타난 훈이는 옥이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동화 속의 백마 탄 왕자님이었다. 훈이를 보는 순간부터 옥이의 가슴에는 멈추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불꽃의 한 점이 날아가 훈이의 가슴에 꽂힌 듯 어느 날 훈이는 옥이에게 다가왔다.
황홀함이란 이런 것일까?
태양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찬란함으로 빛을 발하고, 달빛은 차갑기만 한 줄 알았는데 이 세상 곳곳에 은은하고 포근함으로 밤길을 인도하고 있었다.
아! 꽃에도 이토록 예쁜 갖가지 색깔이 있는 줄 몰랐다. 거기에 향기로움까지 간직하고 유혹하다니. 온 세상이 새로웠다.
여기에 무엇을 더 바란단 말인가.
오직 지금 만을 간직하면 된다. ‘지금’의 모든 것은 영원으로 이어지리라.
온몸의 세포가 행복에 겨워 활기차게 움직이고 눈동자는 빛이 났다.
혹여 라도 질투의 신이 이 전율에 시샘의 눈길을 보내지는 않을까? 설마 그럴 리가.
그래도 때론 두려움이 번뜩인다.
그렇게 그해 여름은 서울에서 온 대학생 훈이와 열아홉 살의 옥이는 옥빛 같은 사랑으로 청아하고도 뜨겁게 보냈다.
작열하는 여름의 끝자락에 훈이는 다음의 방학을 기약하고 훌쩍 가버렸다. 옥이는 그 아름다운 여름밤을 곱씹으며 행복하게 기다렸다.
가을바람이 스산히 부는 날 옥이는 아기를 갖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상상도 못 한 엄청난 일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훈이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훈이는 감감무소식. 어떤 방도도 찾을 수가 없었다.
홀연히 나타났다기 연기 속으로 사라진 것 같았다.
마치 한 여름밤의 꿈인 듯 한 현실에 옥이는 정신 줄을 놓고 있는 듯했다. 뱃속의 아이는 아는지 모르는지 점점 자라나고 있었다.
어김없이 온 겨울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산야를 하얀 눈송이로 덮으며 옥이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는 속절없이 흘러가고 세상을 환희의 초록빛으로 물들인 따사로운 봄날에 옥이는 엄마가 되었다.
아빠를 닮은 듯한 아기의 모습을 볼 때마다 옥이는 훈이를 보는 것 같아 미움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미움 뒤에는 저주가 따라오고, 또 그 뒤로 복수의 칼날이 번쩍이게 되면 혼란에 빠져 때로는 인간의 길을 거부하기도 한다. 또한 끔찍한 불행의 길을 가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버티다 보면 몸안이 텅 비어 후우 하고 불면 날아가는 종이 인간으로 변한다.
그 찬란했던 시간들은 암흑으로 바뀌고 아름다움의 극치를 달리던 사랑은 이 세상에서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가슴을 후벼 파는 고통은 차라리 망각의 길로 들어서면 좋으련만 머릿속은 칙 뿌리처럼 질기게 뒤엉켜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옥이는 환상의 세계와 현실을 오가며 어느 곳에도 정착을 못하고 말았다. 그래도 딸아이는 놓지 않고 업고 다녔다.
젊은 부부를 보게 되면 옥이의 통곡은 산 울음이 되어 골짜기로 퍼진다.
그렇게 깔끔한 성격에 반듯한 모범생으로 칭송을 받던 옥이는 이제 누구도 가까이하기를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었다.
세월은 무심히 흘러 딸아이가 열아홉이 되고, 또 스물아홉이 되도록 옥이는 그 후 바람결에도 훈이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때때로 웃음이 가득한 엄마를 보는 딸은 서글펐다. 아마도 그 아름다운 날의 세계로 가 있으리라. 차라리 그 세계에 그냥 머물러있으면 좋으련만 웃음과 눈물의 세계를 시시때때로 넘나 든다.
하지만 옥이는 딸의 기막힌 아픔은 모른 체한다. 아니, 자기의 아픔이 너 무 커서 모르나 보다.
TV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한 말이 유행한다.
“사랑으론 안돼,날 추앙해요.”
옥이는 받들어 모시기 까지는 바라지도 않았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