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77세.
예전에는 대부분 희수연(喜壽宴)을 했다. 수명이 지금처럼 길지 않았을 때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장수 대열에 들어섰나 보다. 왠지 나에게 장수라는 말이 낯설다.
어느 드라마에서 나이 든 아버지가 걱정되어서 운전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몰래 하다가 작은 사고가 나자 아들이 아버지에게 화를 냈다. 그때 아버지가 서운해서 한 대사가 생각난다.
‘나는 너에게 해줘도, 또 해주고 싶은 마음인데, 너는 내가 조금 잘 못했다고 너무 심하게 나무란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아들은 눈물을 흘렸다.
자식은 부모가 염려스럽고, 부모는 ‘해줘도, 또 해주고 싶다.’는 말에 공감이 갔다.
부모는 자식의 하찮은 말에도 서운해한다. 그런가 하면 작은 성의에도 크게 감동한다.
갑자기 '내가 십 년만 젊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그때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을까?' 하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해 보았다.
67세라면 은회색의 멋진 드레스를 입고 블루스를 추고 싶다. 물론 톰 크루지 같은 사람과 말이다.
지금도 출 수 있다고?
그렇긴 하지만 이제는 넘어질까 두려워서 춤을 배울 수 없다.
그럼 57세라면 무엇을 할까?
참 좋은 나이이다. 아이들도 다 컸고 조금은 여유로운 때가 아닌가.
그러니 반짝이는 코발트블루의 드레스에 새 빨간 하이힐을 신고 정열적인 탱고를 출 것이다. 이번에는 율 부린너와 같은 매력적인 사람과.
탱고, 멋진 음악에 멋진 춤이다. 왜 그때는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아마, 하고 싶어도 남편의 떨떠름한 반응이 싫어서 안 했을 것이다. 틀림없이.
지금 배운다면 다리가 부러질 것이다.
이번에는 47세라면?
아, 정말 멋 부리기 좋은 나이 아닌가. 맘껏 멋을 부려보리라. 평생 염색 한번 안 해보았으니 붉은 머리, 노랑머리, 보라 머리도 해 보고 싶다. 그리고, 노란 스카프 휘날리며 오픈카를 타고 다니리라.
지금이라도 할 수 있다고?
그럼, 한번 해 볼까? 후후 훗. 교통이 마비되면 어쩌지?
하긴 아들에게 드라마에서 여배우가 빨간 스포츠 카를 타고 다니는데 멋있더라고 사달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아들은 그냥 웃기만 했다. 아마도 조만간에 치매 검사를 시켜줄 것 같다.
37세라면?
빨간 슈트를 입고 열정적으로 일을 하며 여행을 할 것이다. 괴테의 불같은 사랑이 이루어졌던 로마에 가서 붉은 와인에 취하고, 낭만의 도시 베네치아에서 바람둥이 카사노바가 여인을 유혹한 산 마르코 광장의 플로리안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리라.
겨울에는 북유럽의 얼음 호텔에서 얼음 잔에 빨간 칵테일을 마시고는 얼음 침대에서 달콤한 잠을 잘 것이다.
물론 지금도 갈 수는 있다.
그러나 낭만이 시들시들해졌고, 무엇보다도 긴 여행이 두렵단다. 세월에 냉정한 몸이.
27세라면?
작열하는 한여름의 태양과 같은 사랑을 할 것이다. 오로지 사랑만을 위한 청초한 사랑을 말이다.
사랑에 나이가 어디 있느냐고?
아직 청초함은 있을지 몰라도 활활 타오르는 정열은 오간데 없으니 흐리멍덩한 사랑이나 되려나?
아니하는 게 낫다.
17세라면?
피어오르는 꽃봉오리 같은 때이니 무슨 꿈인들 못 꾸겠는가. 꿈을 향하여 매진할 것이다.
꿈을 갖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고?
상관이 있고말고. 달려갈 힘이 있어야지.
나에게도 젊은 날들이 있었던가?
그때 나는 어떻게 살았지?
하늘이 두 쪽이 난다 해도 되돌아갈 수 없는 날들을 그리며 오늘도 헛된 꿈이나 꾸어보는 우매한 인간이 되어버렸으니 슬프다.
이쯤에 와서는 허구한 날 꾸는 깨어나면 깨지고 마는 꿈 이외는 아무런 꿈도 갖지 않는다.
누가 인생무상이라 했던가.
한 찰나와 같은 인생살이 이건만 거기에 왜 수많은 사연들이 넘쳐나는지.
또 누군가는 인생은 참으로 아름답다 하였다.
하면, 아름다운 인생을 아름답다 여기며 아름답게 살아왔는가?
혹여, 상처투성이로 비에 젖어 살지는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