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입 장벽이 엄청 높은 소설이다.
1인칭으로 짧게 짧게 나뉘어서 여러 인물들이 각자 '나'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애디 번드런 가족과 이웃들을 포함한 총 15명 인물들의 59개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눔이 그눔인가? 저눔이 이눔인가?
처음 모든 것의 시작은 영화 '버닝'의 주인공 '종수'가 포크너의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한 것이었다.
왠지 모르게 있어 보여서(영화 속에서 '종수'는 문창과를 나온 작가 지망생으로 설정되어 있었고, 아마도 버닝의 이창동 작가가 좋아하는 소설가가 아닌가 싶어서)
나도 한번 읽어보아야겠다고 생각이 들어버렸다.
하지만 '실험적인 문체, 미국 모더니즘의 개척자, 미국의 제임스 조이스, 의식의 흐름'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오, 그눔의 가오(?) 때문에
시작한 소설을 중간에 때려치우기가 찝찝해서,
결국은 끝까지 읽게 되었다.
다만 끝까지 읽고 나서는
기괴하고 비참하고 토할 것 같았다.(이것도 무척 신기한 경험이었다)
높은 진입 장벽을 넘어서면
얻을 수 있는 것은 '기괴하고 비참하고 토할 것 같은 기분'(이러기도 쉽지 않을 것 같은디)
이 소설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책머리에서 가져오면 다음과 같다.
미국 남부의 농촌 마을, 가난한 농부 앤스 번드런의 아내이자 다섯 남매의 어머니인 애디는 중병에 걸려 임종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나머지 가족들은 에디의 죽음을 슬퍼하거나 애도하지 않는다. 무능하고 책임감 없는 남편은 아내의 죽음을 방관하다시피 하고 맏아들 캐시는 앓아누운 어머니의 창밖 앞마당에서 장례에 쓸 관을 미리 만드는 데에만 몰두한다. 둘째 아들 주얼은 가족의 일보다는 자기의 말에 더 큰 애정을 느끼며, 셋째 아들 달은 자기에겐 어머니가 없다는 말을 반복하며 어머니의 죽음을 애써 외면한다. 고명딸 듀이 델은 비밀스러운 어떤 이유로 어머니의 간병과 장례에 정성을 쏟지 못하며, 막내아들 바더만은 어머니의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리다. 애디가 집 근처의 가족 묘지를 마다하고 친정이 있는 제퍼슨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자, 번드런 가족은 애디의 관을 마차에 실은 채 길고 평탄하지 않은 장례 여행을 시작한다.
정상적인 인물이 하나도 없다.
각각의 캐릭터가 극한까지 짜증 난다.
죽어서 관 속에 있는 애디까지도 '나'로 등장해서 주절주절 댄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이 나는
그런 상황이다.
서평에서는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해석하고 연구하는 관점은 다양하다. 가족들의 여정을 자연의 힘에 대항하는 영웅적인 행위로 보는가 하면(내가 보기에 이것은 아닌 것 같다. 뭐 이렇게까지...) 무의미하고 부조리한 여행으로서 보는 견해도 있다.(내가 볼 때는 이것 같은데, 오히려 죽은 애디의 복수 같은 느낌?) 아울러 달의 난해한 구절에 초점을 맞춰 포크너의 존재론적 견해를 밝히는 연구도 상당히 많다.(난해한 달의 말은 뭔 소리인지 모르겠고) 작품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연구가 주류를 이루는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는 포크너의 인종과 성, 생태적 입장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가운데, 특히 이 작품에 대해서는 애디의 죽음이 상징하는 침묵과 공백에 대한 여성주의적 접근이 참신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고 했고
인터넷에는 둘째 아들 주얼의 동성애부터 해서 온갖 해석이 있더라.
.....
그렇게까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책을 읽는 동안 너무 암울했고
책을 다 읽고 나서야
겨우
기분이 나아졌다.
인생의 암울함을 느끼고 싶다면 강추
그렇지 않다면 비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