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회차: 비춰지는 육체, 멈춰서는 카메라

<로나의 침묵>: 주권은 누구의 것인가

토요일 심야 11시 50분. 분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일방적인 말을 쏟아내고 돌아온 길은 차갑고 고요하다. 오렌지빛 가로등이 비추는 한강 위로 미끄러지는 야경과 미술관 서점의 잉크 냄새, 그리고 지하철 한구석에서 건져올린 ㅡ신문지에 싸인 만 원어치의 곧 부서질 듯이 흔들리는 꽃들.

집으로 돌아와 몸을 씻어내고 요가로 근육의 긴장을 푸는 과정은 하나의 정화이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오염된 속도를 씻어내고, 나만의 공간을 복원하는 물리적 보정(Calibration)의 의식이다. 에이솝의 프톨레미 향초가 타오르며 늦겨울의 삼나무와 고대의 숲을 연상케 하는 송진 향을 뿜어낸다. BBC Radio 3의 성탄 음악이 흐르는 이 공간에서, 세계는 더 이상 나를 다그치지 않는다.

다시 한번 감각의 나침반은 돌아간다.


식욕이 멀어지고 알코올에 대한 갈망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그 어떤 기름기를 포함한 육식에 대한 거부(Rejection)의 감각이다. 본래 나는 머핀의 부스러기나 초콜릿조차 입에 대지 않는 사람이다.


아침의 바나나 하나와 소이 라테 한 잔으로 지탱되는 신체는 점점 더 말라가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운 해상도를 획득한다.

이 영화 에세이 시리즈를 연재하며 나는 줄곧 타인의 욕망과 타인의 저항을 분석했다. 하지만 연재의 끝에서 마주한 것은 스크린 속의 인물이 아니라, 차가운 공기가 뇌 깊숙이 박힌 듯한 이 생경한 명료함이다.

소개할 영화의 여주인공인 로나가 상상 임신이라는 고의적 결함으로 시스템의 비즈니스를 마비시켰듯, 나 역시 정지를 통해 일상의 가속을 멈춰 세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프레임 안의 인물을 추격하지 않는다.

나는 인물의 머뭇거림을 묵묵히 기다려주는 고정된 카메라(Static Camera) 그 자체가 되었다.


이것은 욕망의 소멸이 아니라, 감각의 협착(Narrowing)이자 침잠이다.

취하게 만드는 것들, 서두르게 만드는 것들, 나를 외부로 끌어내려는 모든 자극을 제거한 뒤에야 비로소 도달하는 '고의적 정지' 상태.

그 상태는 결코 도덕적 승리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사고가 온전한 형태로 도착할 때까지 글쓰기의 공간을 차갑고 투명하게 유지하려는 기후의 조성이다.


비평은 정답을 내리는 행위가 아니라, 정답이 없는 상태를 얼마나 오랫동안 견딜 수 있는지 증명하는 일이다. 7,000단어가 넘는 아카이브와 수많은 영화적 담론의 끝에서 내가 도달한 결론은 다시금 '영구 미결(Case status: permanent)'이다.

촛불의 끝에서 번지는 쌉싸름한 시더(Cedar) 향과 쉼표의 시간 속에서, 나는 비로소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평온을 누린다.


비평은 말을 멈춤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여기서, 이 최종회는 시작된다.



다르덴 형제의 마스터피스인 <로나의 침묵>은 위장 결혼을 통해 벨기에 시민권을 얻으려는 알바니아 여성 로나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녀는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 이미 예정되어 있는 다른 위장 결혼을 앞두고 임신을 했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녀는 죄책감(혹은 그녀가 느꼈다고 믿게 되는)과 시스템의 압박 속에서 '상상 임신'이라는 기이한 선택을 하죠.

정성일 평론가의 비평적 통찰과 정신과 의사의 임상적 시선을 결합하여, 이 영화의 정수를 정리한 영화 비평 시리즈 최종본입니다.



평론가 정성일은 <로나의 침묵>을 두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로나를 비극의 희생양이나 시스템의 도구, 즉 '대상(Object)'으로 읽지 말라고.

그에게 있어 로나는 시스템의 효율적 논리를 배반하고, 자신의 육체와 시간을 스스로 결정하기 시작한 '주체적 신체'의 탄생이다.

나 역시 이 지점에는 동의한다.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마약 중독자이자 위장 결혼 상대였던 남편 클로디의 죽음 이후 로나의 육체를 다루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카메라는 더 이상 그녀를 자본의 이동 수단으로 쫓지 않고, 그녀의 머뭇거림과 침묵을 기다려준다. 이때 로나는 분명 도구적 존재에서 벗어나 하나의 독립된 '인격적 실체'로 부상한다.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객체성의 굴레는 여전히 프레임 안에 선명하게 보인다.


정신과 의사의 시선에서 영화를 다시 들여다볼 때, 정성일의 선언과 실제 내러티브 사이에는 팽팽한 마찰이 존재한다. 정성일의 주장이 로나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비평적 선언이라면, 관객이 목격하는 존재론적 사실은 여전히 잔혹하다.


로나는 정말로 객체에서 벗어났는가?


내러티브적 차원에서 그녀는 여전히 이민국과 마피아, 경제적 교환 가치라는 거대한 톱니바퀴 사이에 끼어 있다. 그녀가 선택한 상상 임신은 불법 시스템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라기보다, 도구화된 현실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 구축한 '내면의 기록 일기장'에 가깝다.


그녀는 죽은 클로디를 향한 속죄의 대상으로, 스스로 만든 신화의 포로가 됨으로써 현실을 마침내 감당하는 것이다.


그녀는 벗어났는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버티고 있는가


나는 이 지점이 바로 다르덴 형제가 설계한 가장 고통스러운 압력점(Pressure Point)이라고 본다.


로나의 저항은 시스템을 전복하는 해방이 아니라,

시스템이 자신을 소모하지 못하게 만드는 윤리적 감속ㅡ마피아의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고의적 행위이다.


<로나의 침묵>의 카메라는 멈춰 서서 로나의 무거움을 기록한다.

로나가 주장하는 뱃속의 아이는 생물학적으로는 부재하나,

미학적으로는 그녀의 신체에 거대한 질량(Mass)을 부여한다.


로나는 스스로 상상 임신이라는 고의적 결함을 일으킴으로써 마피아의 비즈니스 타임라인을 교란한다.

그녀는 자유로워진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환전이 불가능한(Unexchangeable) 부품이 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인간성을 증명한다.


카메라가 추격을 멈추는 순간, 그녀는 비로소 인격이 된다.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의 시선은 기록하는 장치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물의 존재론적 지위를 결정하는 프레임의 역할로 기능한다.


시스템의 속도와 분절의 측면에서 바라보자ㅡ 영화 초반, 카메라는 로나의 뒤를 바짝 쫓는다. (다르덴 형제의 또다른 작품 <로제타>의 'Corps-caméra' 양식).


로나의 신체는 프레임 안에서 종종 분절되며,

그녀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보다 브로커의 ‘제시간에 도착하는가’라는 명령에 포섭된 대상처럼 비친다.


그런데 남편 클로디의 죽음 이후 카메라에 정지(Static)와 거리두기가 나타난다. 카메라는 이제 로나를 다그치지 않는다. 그녀가 침묵하거나 허공을 응시하는 비효율적인 시간을 긴 롱테이크로 온전히 담아낸다.


특히 숲속 장면에서 카메라는 로나를 관음하거나 망상증으로 진단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로나가 스스로 구축한 그 ‘신화적 공간’에 머물러 준다.

이는 카메라가 그녀에게 부여한 일종의 미학적 치외법권일 것이다.


카메라가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로나는 더 이상 화폐의 가치로 치환되는 객체가 아니다.

그녀는 프레임 안에서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오직 자신의 내면적 진실과 대화하는 주권(Sovereignty)을 회복한다.


이 영화에서 로나의 선택은 주체가 되기 위한 선언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부여된 속도를 거부함으로서 시스템의 계산을 파괴하는 본능적 행위이다.


이것은 병리가 아니라, 삶을 지속하기 위한 마지막 알리바이이다.


정신의학적으로 로나의 상태는 ‘해리’나 ‘망상’으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형식 안에서 그 병리는 삶을 지속하기 위한 유일한 알리바이로 볼 수 있다.

나의 관점에서ㅡ윤리란 인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이 멈춰 서서 침묵할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로나는 완전히 대상에서 탈피한 것이 아니다.

자신을 스스로 대상화하기를 선택함으로써 외부의 대상화를 거부했다.

그녀는 승리하지 않았고, 해방되지도 않았다. (She did not triumph, nor was she liberated.)


다만 불법 자본의 시스템이 도저히 계산해낼 수 없는 비합리적인 무게를 지닌 채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을 뿐.

우리는 로나의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거친 마찰음을 들어야 한다.


그것은 도구가 되기를 거부한 인간이 자신의 생애를 걸고

노면에 지를 수 있는 가장 고독한 브레이크 소리이다.


윤리는 구원이 아니라, 침묵할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다.

본 연작의 맺음은 정성일 평론가의 비평적 예리함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임상 현장에서 마주하는 인간의 '방어 기제로서의 선택'이 어떻게 개인의 저항으로 승화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자 했습니다.


시리즈의 마지막을 함께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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