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yes Wide Shut, 폐쇄된 시선과 계약의 유지

정신과 의사의 시선으로 바라본 욕망의 본질


Prologue


이 영화의 제목은 형용적 모순이 아니라, 상태의 기술이다. 〈Eyes Wide Shut〉은 눈을 부릅뜬 채로 맹목(blindness)을 선택한 자들의 기록이다. 스탠리 큐브릭은 여기서 사랑의 배신을 묻지 않는다. 그는 더 잔혹한 질문을 던진다. 결혼은 욕망의 안식처인가, 아니면 욕망을 영하의 온도로 박제하기 위한 보관소인가.


빌과 앨리스의 부부 관계는 견고하다. 그러나 그 견고함은 신뢰의 밀도가 아니라 억압(repression)의 정교함에서 기인한다. 정신분석적으로 볼 때, 이들의 평온은 평화가 아니라 '말해지지 않은 것들의 무덤' 위에 세워진 비석이다. 억압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일상의 가구 밑으로, 혹은 배우자의 매끄러운 피부 아래로 위치를 옮길 뿐이다.

앨리스의 고백은 그 무덤을 파헤친다.

“당신을 떠날 생각을 한 적은 없지만, 어떤 순간 모든 걸 버릴 수도 있었어.” 이 문장은 외도의 고백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것은 타자의 욕망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의 통보다. 빌이 믿어온 결혼은 사랑의 계약이 아니라, 서로의 욕망을 보지 않기로 합의한 협정이었다. 영화는 그 계약이 파기된 직후의 냉기를 따라간다.

I. The Wound of Fantasy — 환상이 찢어지는 소리


앨리스의 고백은 배신의 증거가 아니라, 환상의 파열음일 뿐이다. 빌은 아내를 사랑한다고 믿었으나, 사실 그는 아내를 '알고 있다'는 확신 속에 그녀를 가둬두었을 뿐이다.

그는 아내를 독립된 타자가 아닌, 자기 환상을 지탱하는 부속품으로 포섭해왔다.

“모든 걸 버릴 수도 있었어”라는 말은 욕망의 실행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욕망의 가능성(possibility)이 발아했다는 뜻이며, 그 가능성 하나만으로 빌의 세계는부서진다.

환상은 안전하게 통제될 때만 기능을 유지한다.


타자의 욕망이 자신의 관리 범위를 벗어났음을 깨닫는 순간, 환상은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닌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주체를 공격한다.


빌의 불안은 질투라고만 할 수는 없으며 그것은 '통제의 상실'에서 오는 공포다. 그는 아내의 욕망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더 자극적인 장면, 더 노골적인 금기를 찾아 밤의 도시로 나간다. 깨진 환상을 더 거대한 환상으로 봉합하려는 반복 강박(repetition compulsion)적인 방어 기제이다. 그러나 욕망은 대체되지 않는다.

그는 아내의 어두운 내면을 마주하는 대신, 자기 욕망의 그림자만을 쫓으며 텅 빈 거리를 배회한다.


II. The Night Journey — 지연된 가속, 유예된 욕망


빌의 밤길은 쾌락을 향한 가속이 아니라, 안전을 확인하기 위한 지연이다. 앨리스의 고백 이후 그에게 남은 단 하나의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여전히 이 시스템의 주인인가.”

정신분석적으로 빌의 방황은 실행(acting out)이 아니라 환상의 복구를 위한 순례이다.

그는 소돔의 거리를 걷지만, 결코 문턱을 넘지 않는다. 유혹은 도처에 널려 있으나 실행은 매번 중단된다. 이 중단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설계다. 그는 욕망을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욕망을 '안전한 거리에서 관찰'하고 싶을 뿐이다.

관찰자로 남아야만 아내의 욕망도, 자신의 충동도 여전히 '관리 가능한 데이터'로 남기 때문이다.

그가 걷는 도시는 욕망의 미로가 아니라 '방어 기제의 미로'다. 그는 끊임없이 이동하지만 단 한 치도 나아가지 않는다. 그의 발걸음은 목적지를 잃은 것이 아니라, '확인'이라는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이 밤의 끝에서 그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러나 그 무(無)의 순회는 그를 더욱 피로하게 만들고, 결국 시스템으로 돌아가게 하는 동력이 된다.



III. The Ritual of Exposure — 가면과 거세

비밀스러운 의식의 현장은 욕망의 해방구가 아니다. 그곳은 '노출의 제단'이다. 가면 무도회의 핵심은 익명이 아니다. 누가 욕망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보여지는가(to be seen)'가 중요하다.

이 공간에서 가면은 개인을 보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욕망을 계급화하고, 침입자를 선별하기 위한 장치다.

빌은 여기서 참여자가 아닌 목격자로 머문다. 그의 욕망은 이 공간에서 좌절되고, 오직 발각됨에 대한 공포만이 남는다. 한 여인이 그를 대신해 희생을 자청하는 순간, 빌은 자신이 누려온 모든 환상이 누군가의 희생과 위험 위에 세워진 사상누각임을 깨닫는다. 그녀는 구원자가 아니었기에.


의식은 그를 처벌하지 않는다. 단지 차갑게 선언한다.


“너는 이 욕망의 주인이 아니다.”


가면은 벗겨지지 않았으나 이미 무의미하다. 빌이 찾아온 곳은 금지된 낙원이 아니라, 자기 환상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거세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의식은 욕망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끝에 도사린 허무와 한계를 폭로한다.


IV. Aftermath — 침묵의 재봉합(Suture)


빌은 침대로 돌아온다. 앨리스의 곁에 놓인 마스크는 그가 밤새 도망쳐온 진실이 이미 집 안 깊숙이 침투해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결혼은 유지되고, 일상은 복원된다.

정신분석적으로 이 결말은 해소가 아니라 재봉합(suture)이다. 찢어진 환상의 틈새를 억지로 꿰매되, 그 실밥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는 묻지 않기로 약속하는 것. 침묵의 결이 달라졌다. 이전의 침묵이 무지에서 왔다면, 이제의 침묵은 '알면서도 보지 않기로 한 합의'에서 온다. 빌은 욕망을 이해하지 못했고, 앨리스는 그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진실을 공유하는 대신, '공동의 맹목'을 공유하기로 선택한다.


여기서 제도는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 서로의 심연을 외면하기 위한 최후의 방어선으로 기능한다.



Epilogue — 닫힌 눈으로 지탱하는 세계


〈아이즈 와이드 셧〉은 욕망의 지도를 그리는 영화가 아니다. 욕망이 제도라는 아카이브 속에서 어떻게 '영구적 미결'로 남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눈을 감는 것은 무능이 아니라 유지를 위한 기술이다.


관계는 모든 것을 드러내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진실 위로 '차갑게 눈을 감을 때'만 간신히 유지된다.



마지막 대사는 해결이 아니라 연기(play)의 재개다.


욕망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일상의 더 깊은 층으로 매립되었다.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사는가,

아니면 서로의 진실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눈을 감은 채 걷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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