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건네고 싶었던 말들
내가 다섯 살쯤이었을까.
아빠가 어느 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얘는 나한테 평생 할 사랑을 다 했다.”
어릴 적 나는 말을 참 예쁘게 했다고,
요즘도 아빠는 가끔 그 시절 얘기를 꺼내곤 하신다.
예쁘게 말하던 아이.
지금 서른을 앞둔 나는,
여전히 그런 사람일까?
‘예쁜 말.’ 도대체 뭘까.
듣기 좋은 말?
착한 말?
칭찬?
사람들이 기대하는 말?
아직도 어떤게 예쁜 말인지 잘은 모르겠다.
‘자존감을 지켜주는 말’
취업 준비 중인 친구,
고시 공부에 지친 친구에게
“너라면 꼭 잘 될 거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진짜 돼.”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말했던 적이 있다.
그 말이, 조금이라도 그 사람에게 보탬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러나 가끔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혹시 그 말이, 부담이 되진 않았을까?
고시공부하는 아들 옆에서 “우리 아들 할 수 있다!”고
힘껏 응원하던 엄마의 말이
어느 순간 부담스러운 방해로 느껴지기도 하듯이.
어떤 예쁜 말은, 적당한 ‘빈도’가 중요하구나...
그걸 뒤늦게 알았다.
‘살리는 말’
이제는 세상을 떠난 내 친구.
연락이 뜸했던 사이였지만,
자살 소식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수없이 머릿속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내가 먼저 안부를 물었다면?”
“그냥, 별 이유 없이 연락해봤다면?”
민망하더라도, 어색하더라도.
정말 그랬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그리고 알았다.
사람을 살리는 말은, 100번이든 1000번이든 해도 넘치지 않는구나.
그래서 마음먹었다.
살릴 수 있는 말은
내가 민망해질지언정,
넘치도록 하자고.
어떤 예쁜 말은, 차라리 넘쳐야 한다.
그건 후회하면서 배웠다.
‘사랑한다는 말’
나는 박애주의자이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이
꼭 연인이나 가족 사이에서만
허락된 말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나는 엄마를 사랑하고,
아빠, 동생, 누나, 강아지들, 친구들까지.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란 늘 조금 어색하다.
그래서 자주 못 한다.
그래도 가끔은 생각한다.
“친구놈들한테 ‘사랑해’라고 말하면, 미친놈이냐 욕은 좀 먹어도 속으론 좋아하지 않을까?”
욕좀 먹어도, 사랑한다는 마음이 전달 되면 됐다.
사랑한다는 말은, 넘치게 해야 할 말이라는 걸
이젠 정말로 확신한다.
예쁜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걸 많이 고민했다.
그런데 어쩔 땐 내가 건네는 말들이
예쁘게 포장된 텅 빈 선물상자 같기도 했다.
겉은 화려한데, 정작 그 안엔 내가 직접 넣지 않은 말들.
그래서 허무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내가 건네던 말들—
사실은,
전부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나를 다독이고 싶어서,
나를 안아주고 싶어서,
그런데 스스로에게 말하긴 두려우니까,
대신 남들에게 건넸던 말들.
그 예쁜 말들은
결국 나를 살리기 위해 누군가에게 던졌던 말들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생각한다.
예쁜 말이란, 예쁜 마음에서 나온다.
예쁜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해도
그건 결국 텅 빈 상자일 뿐이다.
나는 음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내 마음을,
내 언어를,
내 감정을
예쁜 말, 예쁜 가사로 담기로 했다.
내 말에 누군가가 행복을 느끼고,
위로를 받고,
치유 받는 순간이 있다면
그 순간들이 나에게는 가장 큰 행복이다.
언젠가 그 순간을 무대에서 마주할 수 있다면—
그게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일 것만 같다.
그날이 올 때까지,
나는 나의 예쁜 마음을
꾸준히 다듬고,
조용히 간직해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