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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an Water

물(1)

by 우아한 우화

오늘은 빨래를 해야 한다. 김치도 담가야 해서 배추도 주문한 상태다. 그런데 싱크대에서 나오는 물이 시원찮다. 접시 하나 씻으려면 족히 20초는 걸리는 듯하다. 왜 매니지먼트에서 물차를 부르지 않는지 모르겠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단톡방에 [물이 안 나오는데 다른 집은 어때?]라고 올렸다. 그 글이 무색하게 얼마 지나지 않아 육중한 물차가 시커먼 매연을 뿜으며 물탱크가 있는 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처음 물차를 보았을 때가 떠오른다. 내가 보기에는 외관만 청량한 파란색으로 칠했을 뿐 영락없는 똥차인데 버젓이 ‘클린워터’라고 적어놓고 물을 실어 나른다. 떠도는 말에 의하면 오래전 이 물차들은 내가 알던 대로 똥을 푸는 차였으나 물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하루아침에 물차로 둔갑하였다고 한다. 그랬다고 해도 물 없이는 하루도 버티기 힘들다.


몇 해전 이곳을 떠난 지인이 해줬던 말이 생각난다. 어느 날부터인가 집 주변에서 공사를 시작하면서 물이 아예 안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집은 타운하우스라 개인적으로 물차를 불러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샤워를 하는데 갑자기 엄마를 다급하게 부르더니 물에서 똥냄새가 난다며 짜증을 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은 후 물차가 오면 하얀 컵에 물을 받아 색을 확인하고 냄새를 맡아보게 되었다.

물차가 실어오는 물의 출처는 알 수 없지만 가끔은 깨끗한 물이기도 하나 대부분은 그다지 깨끗하지 못하다. 물을 채우면서 탱크 안이 뒤집어져 가라앉아 있던 온갖 부유물이 떠올라서 그런다고 하지만 더러운 물은 그냥 더러운 물이었다.

이곳에 30년 가까이 살고 있는 지인은 기본이 안 되는 몇몇 것들이 삶을 고단하게 한다고 했다. 맞다. 기본적인 것들, 너무 당연한 것들이라 고마운 줄 모르고 살았던 삶에서 그 기본적인 것들도 충족되지 못하는 삶으로 오니 이전의 삶을 감사하기보다 지금의 삶을 불평하게 되었다.


우우웅 시끄러운 소리가 컴파운드 안에 울려 퍼진다. 물이 채워지고 있다. 물차가 다녀간 후 하얀 컵에 물을 채워보니 보리차보다 연한 갈색에 아주 작은 검은 부유물들이 몇 개 둥둥 떠다닌다. 변기물은 내려도 안 내린 것처럼 보이고 쌓여있는 빨래는 하는 게 나은지 그냥 놔두는 게 더 깨끗할지 가늠이 안된다. 하얀 옷들은 이미 빛을 잃고 각기 다른 누런색으로 칙칙하게 바뀐 지 오래다. 어찌 되었든 이 물로 샤워도 하고 빨래도 하고, 그렇게 본래의 빛은 잃었어도 입고 먹고 어떻게든 산다. 이만한 삶도 누군가에게는 호사스러운 삶이라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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