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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송이와 사춘기

뾰족한 그녀

by 여토


딸은 요즘 들어 점점 더 말이 없어졌다.

아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을 고를 줄 모른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엄마가 한마디 건네면 돌아오는 건 짧고 날 선 대답뿐이었다. 짜증, 무시, 거짓말, 욕설. 그리고 가끔은 폭언까지.


"그만 좀 하라니까!”
"내 인생에 참견하지 마!”
“몰라, 귀찮아 죽겠다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말대꾸 하나 없이 등을 돌려 부엌으로 향하거나,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숨죽여 운다.

가끔은 북받쳐 화장실 샤워실에서 소리 내 울기도 한다.


다음 날 아침이면 식탁 위엔 늘 하루 먹을 식사세트가 있었다.

돌아오면 딸의 방안에 개켜진 옷이, 새로 빤 양말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딸은 그런 엄마가 더 답답했다.

왜 가만히 있는 건데. 왜 따지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그냥 있는 거냐고. 차라리 소리라도 지르지. 울고불고 매달리기라도 하지.

매달리고 따지는 엄마도 싫고 그냥 다 싫은 거다.


그래서 더 날을 세웠다.

밖에서는 친구들과 몰래 담배를 피웠고, 엄마에게는 계속 거짓말을 했다.

엄마가 건네는 쪽지는 모른 척 구겨버렸고, “오늘도 수고했어”라는 글귀가 적힌 문자를 보며 신경 쓰는 자신이 싫어 더 거칠게 굴었다.


어느 날 밤, 엄마는 홀로 걸음을 옮기다 발끝에 걸린 뭔가를 보았다.


갈색 껍질에 온통 가시가 돋친, 둥그런 밤송이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아무도 밟지 못하게 뾰족하게 몸을 세운 채, 작은 울퉁불퉁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무심코 그것을 주워 들었다.

손끝이 따끔거렸다.

조심조심 껍질을 벌리자, 그 안에는 반들반들한 밤알이 고요히 자리하고 있었다.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딸이 생각난다.


언젠가 알 수 있기를ᆢ


자신이 평소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왜 그렇게 가시를 세우며 살아왔는지, 그리고 엄마가 왜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안아주려 했는지.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졌음을 아는 날이 오기를ᆢ


밤송이는 처음부터 뾰족한 것이 아니다. 그 속엔 누구나 놀랄 만큼 단단하고 반듯한 것이 숨어 있다. 그리고 언젠가 그 껍질은 저절로 벌어지며, 그 속의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딸이 아직은 날이 서 있고, 쉽게 상처 주고 또 쉽게 다치는 존재라는 것을. 하지만 결국 그 딸이, 그렇게 뾰족하게 살았던 그 시간이, 한 사람의 형태를 만들어주는 과정이라는 것도.


밤송이처럼 뾰족한 그 딸은, 언젠가 속살을 드러낼 것이다.

상처 주지 않아도 사랑받을 수 있고, 날을 세우지 않아도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뾰족한 모습은 서서히 사라지고

손안에 쏙 들어오는, 단단하고 매끄러운,

둥근 공처럼 변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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