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②일회용 비닐우산
#드라마 슈룹과 우산
지난해 모 케이블 방송에서 방영한 슈룹이란 드라마를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다. 드라마 제목 슈룹이란 말이 너무 낯설어 검색해 보니, 우산의 순우리말이었다. 슈룹의 어원은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고, 훈민정음해례본에 우산을 닮은 왕실 의장(儀仗)의 하나인 우산산(繖)을 포함한 한자어 위우산(爲雨繖)과 함께 한글로 슈룹을 병기(倂記)한 기록이 나올 뿐이다.
세자(世子) 자리를 놓고 치열한 차기 대권 경쟁을 하는 왕실 권력의 중심에서 자식들의 우산 역할을 하는 중전(中殿)의 궁정 일기를 그린 사극의 타이틀을 우산의 순우리말 슈룹으로 차용(借用)한 발상이 흥미로웠다.
#패션이 된 우산
우산이 패션의 한 장르가 된 시대라 각양각색의 우산이 즐비한 세상이다.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투명 비닐우산과 접이식 우산, 장우산(長雨傘)부터 두 번 접을 수 있는 삼단(三段)우산, 골프장에서 사용하는 길이가 길고 폭이 넓은 골프 우산, 고가(高價)의 명품 5단 우산까지 모양과 특징, 크기와 가격이 다양한 우산들이 널려 있다. 모두 다 손잡이에 달린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우산이 펴지는 방식이다.
요즘 우산은 색깔과 모양이 다양하고 내구성도 뛰어나 고장도 잘 나지 않는다. ⓒPARK IN KWON
#70~80년대 초 우산의 대명사, 일회용 비닐우산
지금과 달리 70~80년대 초만 하더라도 일회용 비닐우산이 우산의 대명사처럼 널리 사용됐다. 그때는 경제 사정이 지금과 많이 달라 식구 수대로 천 우산을 사기가 힘들어 일회용 비닐우산을 주로 애용했다. 일회용 비닐우산은 대나무를 가늘고 길게 쪼개 만든 대나무 살에 푸른색 얇은 비닐을 덧댄 우산이다. 우산 손잡이도 대나무다. 한 손으로 손잡이 부분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손잡이 바로 위에서부터 서서히 밀어 올리면서 우산을 펴는 수동식이다.
#우산대 위 철사 고리의 처연한 삶
우산대 윗부분에 대나무 살을 고정하는 철사 고리가 설치돼 있다. 이 고리가 찰칵, 하고 소리가 나면 우산이 제대로 펴졌다는 신호다. 우산을 접을 때는 엄지손가락으로 이 고리를 힘차게 꽉 눌러야 한다. 고리의 재질이 부러지고 휘기 쉬운 철사라 우산을 펴고 접을 때 딱, 하고 철사 끊어지는 소리가 나거나 우산대 또는 대나무 살에서 철사가 삐져나오는 경우도 많았다.
손재주가 좋은 사람들은 철사 고리를 고쳐 사용하기도 했고, 무시(無時)로 동네 골목길에 나타나는 우산 수리 장수한테 맡기기도 했지만, 대개는 그냥 버렸다.
#일회용 비닐우산의 에피소드
일회용 비닐우산은 말 그대로 내구성이 떨어지는 일회용이라 에피소드도 많았다. 가장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 비닐로 만들어진 우산 덮개가 바람에 뒤집히는 것이었다. 요즘의 투명 비닐우산과 달리 당시 일회용 비닐우산은 비닐의 두께가 얇고 조악해 비바람이 조금만 세게 몰아쳐도 비닐 덮개 허리가 뒤로 꺾이는 일이 잦았다. 이럴 때는 바람 부는 방향으로 우산을 힘차게 밀면 다시 확 뒤집히며 원래대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렇다고 비닐 덮개가 늘 원상태로 회복되는 것도 아니었다. 꺾인 비닐 덮개의 허리가 다시 펴지기를 바라는 기대와 달리, 바람의 강도가 너무 세 비닐이 찢어지거나 대나무 살이 부러져 아예 못 쓰게 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가장 황당할 때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비바람을 뚫고 나가다가 강풍을 만난 대나무 살이 맥없이 부러지면서 비닐도 함께 찢겨나가는 경우다. 졸지에 우산으로부터 버림받은 신세가 된 꼴인데, 우산을 버리고 우중(雨中) 백의종군하거나 새로 비닐우산을 사는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일회용이었던 옛날 비닐우산과 달리 요즘 비닐우산은 천 우산처럼 덮개나 우산 살 모두 튼튼해 잃어버리지만 않으면 오래 쓸 수 있다. ⓒPARK IN KWON
#일회용 비닐우산 장수의 대목, 장마철
요즘에는 첨단 기상정보 시스템을 코웃음 치는 기상이변 때문에, 그때는 아날로그식 걸음마 수준의 날씨 관측 때문에 일기예보가 헛다리를 짚는 일이 많았다. 장마철의 기습적인 소나기, 돌발적인 호우(豪雨)는 일회용 비닐우산 장수에게 호재(好材) 중의 호재였다.
그 시절 길을 걷다가 느닷없이 쏟아지는 소나기는 장마철에 흔했다. 이름 모를 집이나 가게 처마 밑, 건물 현관 입구로 뛰어 들어가 잠시 비를 피하다 보면 어디에 있다 나타났는지, 일회용 비닐우산 장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산 장수는 우산 대신 우의(雨衣)를 입고 있었는데, 만면에 화색(和色)이 돌며 큰 목소리로 우산 사세요, 우산, 비닐우산 있어요, 하고 외쳤다.
옛날 비닐우산의 살이 대나무라면 요즘 비닐우산의 살은 알루미늄 소재다. ⓒPARK IN KWON
#소나기의 습격
비 오는 날은 우산 장수에게 대목이었다. 버스 정류장은 물론이고 극장 앞,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면 어김없이 비닐우산을 한 아름 든 우산 장수가 호객행위를 하곤 했다. 초등학교 시절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 하굣길에 갑자기 퍼붓는 소나기를 만나 당황한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어린 학생의 호주머니 사정이 뻔한지라 우산을 살 돈은 없고 에라 모르겠다, 책가방을 머리 위로 받쳐 든 채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며 달음박질해 집까지 쏜살같이 달려간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소나기가 오는 날이면 학교 정문 앞에서 우산을 들고 아들, 딸을 기다리는 엄마들도 여럿 있었다.
#일회용 비닐우산의 목소리
쉽게 망가지고 고장 나는 일회용 비닐우산이지만 천 우산이나 고급 우산이 흉내 낼 수 없는 정감 어린 낭만도 있었다. 일회용 비닐우산을 편 채 위아래로 살짝살짝 흔들면 들썩들썩, 하는 소리가 난다. 비닐이 얇고 가벼워 공기 저항에 짓눌려 나는 소리다.
희한하게도 그 소리는 따스하고 정겨웠다. 소리로 우산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우산의 목소리로 들렸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편의점에서 파는 투명 비닐우산은 플라스틱 뼈대에 비닐도 질기고 두껍고 튼튼해 위아래로 흔들어도 옛날 비닐우산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일회용 비닐우산의 낭만은 우산 위로 투 둑, 투두둑 하고 빗방울이 떨어질 때 푸근한 감성으로 다가온다. 빗방울이 우산의 비닐과 만나 들려주는 소리는 기계적인 소리가 아니라 자연의 언어라 추억이라는 형용할 수 없는 가치를 우리에게 안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편의점에서 언제든지 살 수 있는 천 우산. ⓒPARK IN KWON
#일회용 비닐우산과 인정(人情)
일회용 비닐우산의 낭만은 또 있다. 우산 하나로 친구와 둘이 나란히 어깨동무하고 걸어간 기억, 버스 정류장까지 황망하게 비를 맞고 걸어가는 나를 본, 이름 모를 아저씨가 마음씨 좋게 우산을 받쳐준 기억도 난다. 그때는 우산이 없으면 우산을 씌워주는 사람도 있었고,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가게 아주머니가 비닐우산을 빌려주기도 했다.
#머피의 법칙과 우산
지금도 그럴 때가 있지만, 어릴 때도 머피의 법칙은 우산을 소환한 적이 많았다. 비가 오겠거니 해 우산을 들고 집 밖을 나서면 비가 안 오고, 비가 안 오겠거니 해 우산을 안 들고 나가면 비가 오는 경험 말이다.
누군가 비는 구름이 인간에게 준 하늘의 선물이라 했다.
시인 정호승(1950~)은 비닐우산을 의인화한 감각적인 시어로 비닐우산을 찬미(讚美)했다. 비닐우산이란 제목의 그 시에서 비닐우산은 이렇게 말한다. 비를 맞으며 걷는 일보다 바람에 뒤집히는 일이 더 즐겁고, 바람에 뒤집히다 못해 빗길에 버려지는 일이 더 즐겁고 행복하다.
천 우산이나 비닐우산이나 요새 유통되는 우산은 우산 살을 홈에 끼우는 방식이라 덮개와 분리할 수 있다. ⓒPARK IN KWON
#죽음으로써 소임(所任)을 다하는 일회용 비닐우산
찢기고 망가지고 부서짐으로써 삶을 다하는 일회용 비닐우산. 일회용 비닐우산은 인간의 감성과 추억을 비와 자연의 언어로 흔들어 깨우는 정서적 영감(靈感)의 옹달샘이라 여겨진다.
90년대가 되면서 일회용 비닐우산은 자취를 감췄다. 이제는 생활사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일회용 비닐우산이다. 세월이 흘러도 일회용 비닐우산이 남긴 추억은 그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