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군것질의 추억 ③황도(黃桃), 번데기, 밀크 캐러멜, 카스텔라 外
군것질의 추억 ③황도(黃桃), 번데기, 밀크 캐러멜, 카스텔라, 크라운산도
#국민 감기약, 판피린 코프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인 70년대에는 감기 환자가 많았다. 환절기가 되면 교실에 빈 의자가 군데군데 눈에 띄었는데 감기 기운이 심해 학교에 나오지 못한 아이들 때문이었다. 영양상태나 위생 환경이 지금만 못할 때라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사회적 면역체계가 허술한 현실적 이유가 컸을 것이다.
그때 감기에 걸리면 집, 집마다 동네 약국에서 꼭 사는 약이 있었는데 판피린 코프라는 이름의 액상 감기약이었다. 병에 담긴 판피린 코프는 마시는 종합 감기약이었는데 그 시절 국민 감기약으로 불릴 정도로 감기만 걸리면 찾는 필수 의약품이었다.
작은 플라스틱 용기에 판피린 코프를 몇 번 따라 마시고 나면 이상하게 감기 기운이 달아나는 듯했는데, 알게 모르게 감기에 특효약이라는 선입견이 작동된 결과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아플 때 먹었던 특별식 황도(黃桃)
아이들이 감기에 걸리면 콧물을 흘리고 기침이 났는데, 판피린 코프와 함께 어머니가 특별히 챙겨준 영양식을 잊을 수 없다. 영양식은 복숭아 통조림인데 식구들끼리는 황도(黃桃)라고 불렀다. 황도는 복숭아의 품종 중 하나로 과실의 살이 노랗고 알찬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통조림용 복숭아의 대명사인 황도는 먹기 좋게 조각난 모양으로 흥건한 시럽에 잠겨 있었고 복숭아 한 입 베물고 시럽 한 숟갈을 떠먹으면 꿀맛이었다.
플라스틱 용기 안 시럽에 잠긴 복숭아 슬라이스. 옛날 황도 통조림 복숭아의 모습이 이랬다. ⓒKen Hammond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감기 걸리면 생각난 황도
황도는 감기에 걸리거나 몸살이 심하고 아플 때만 특별히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철없는 아이 때라 한겨울에 감기에 걸려 며칠 고생하면서도 황도를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곤 했었다. 황도는 추운 겨울날 먹을 때 제일 맛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차가운 시럽의 서늘한 맛에 달짝지근하게 씹히는 복숭아 과실의 부드러운 풍미가 잠시나마 추위를 잊게 해준 덕분이라 여겨진다.
요즘도 어릴 때 많이 먹었던 황도의 맛을 잊을 수 없어 가끔 호프집에서 맥주 안주로 시키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옛날 추억에 잠겨 미소를 짓곤 한다. 치킨이나 골뱅이, 계란말이만큼은 아니지만 맥주 안주로 제법 어울리는 복숭아 통조림은 지금도 흔하게 볼 수 있다.
#만만한 길거리 주전부리, 번데기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었던 황도와 달리 길거리 주전부리로 친근하고 흔한 음식도 있었다. 지금은 횟집에서만 볼 수 있는 서비스 안주 번데기 말이다. 번데기는 70년대와 80년대만 하더라도 만만한 길거리 간식으로 인기가 많았고 노점상이나 손수레 행상꾼들이 즐겨 파는 대표적인 메뉴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고 따끈따끈한 번데기는 고깔 모양으로 접은 신문 봉지에 담아 한 봉지에 얼마씩 팔았는데 고소하면서 짭조름한 맛이 꽤 중독성이 있었다. 값이 싸고 들고 다니면서 봉지를 입에 대고 번데기 몇 개씩을 틀어넣어 씹어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유원지나 관광지, 시외버스 터미널에 가도 번데기 장수를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단맛과 우유 맛, 입맛 돋우는 향내 삼박자가 어우러진 밀크 캐러멜. ⓒEvan-Amos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단맛과 우유 맛, 향내가 돋보인 밀크캐러멜
밀크캐러멜의 맛도 잊을 수 없다. 해방 후 국내에 처음 출시된 것으로 알려진 캐러멜은 70년대 후반 밀크캐러멜이 등장하면서 캐러멜 시대를 열었다. 담뱃갑보다 조금 작은 직사각형 종이갑(匣) 안에 은박지로 포장한 스무 개가량의 정사각형 캐러멜이 들어 있었고 하나씩 꺼내 까먹었다.
밀크캐러멜은 설탕과 우유, 향료 따위를 섞어 졸인 뒤 굳힌 과자로 딱딱한 듯하면서 이빨로 깨물면 말랑한 특이한 식감이 매력적이었고, 단맛과 우유 맛에 더해 입맛을 돋우는 향내가 아이들의 군것질 욕구를 사로잡았다. 밀크캐러멜은 동네마다 흔한 편의점에서도 팔아 지금도 여전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스펀지케이크, 카스텔라
빵이 식사 대용식(代用食)이기도 한 지금과 달리 단순 간식거리였던 그때 카스텔라도 아이들이 선호한 주전부리였다. 스펀지케이크라는 별칭답게 입에 넣으면 살살 녹아 부드러운 풍미가 혀끝을 거절할 수 없게 자극하는 카스텔라는 동네 제과점이나 가게에서 팔았는데 아이들이 선뜻 사 먹기에는 가격이 만만찮았다.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제과점 진열대를 한참 쳐다보고 있으면 그놈 참, 하면서 어머니는 지갑을 열었다.
입에 넣으면 살살 녹는 부드러운 풍미가 일품이었던 카스텔라. ⓒkatorisi •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크림의 마력(魔力), 크라운산도
크라운 산도라는 이름의 비스킷도 추억의 간식거리였다. 1961년에 처음 출시된 크라운 산도는 60년 넘게 사랑받는 식품으로 국내 과자 역사 계보의 한두 손가락 안에 꼽히는 최장수 비스킷이다. 두 개의 비스킷 사이에 크림이 들어간 크라운 산도는 샌드위치 쿠키 스타일인데 바삭바삭한 비스킷의 텁텁함을 달콤하고 부드럽고 촉촉한 크림이 눌러주는 기막힌 조화로 아이나 어른 모두 좋아했다.
먹는 방법도 재미있었다. 샌드위치처럼 비스킷과 크림을 동시에 깨물어 먹는 아이도 있었고 비스킷 하나를 떼 낸 뒤 먼저 크림을 혀로 날름날름 핥아먹은 다음 비스킷을 씹어먹는 아이들도 있었다. 혀로 크림을 핥을 때 희한하게도 묘한 기분이 들었는데 크림의 단맛과 부드러운 촉감에 더욱 끌린 것이 그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