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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Feb 13. 2024

학창 시절 풍속사(風俗史)

32. 교련(敎鍊) 교육의 추억

교련(敎鍊) 교육의 추억     


#고교 군사 교육 재개의 배경

 군사 교육이 고등학교 정식 교과목이었던 시절 이야기다. 과목명은 교련(敎鍊). 한자어대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군사훈련이다. 지금 기준으로는 고등학생에게 난데없는 군사훈련이라니, 생뚱맞게 들릴 법하나 사실이었다.     


학생 군사훈련이라는 이름으로 고등학생들에게 교육한 교련의 역사는 6·25 전쟁 중이던 195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 4시간씩 연간 156시간 실시한 군사 교육은 1955년 중단됐다가 1969년부터 재개됐다. 14년 만에 다시 시행하게 된 배경은 1968년에 터진 1 · 21 청와대 기습사건이 결정적이었다.      


#청와대 기습사건

청와대 기습사건은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부대 소속 특수부대원 31명이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를 공격하는 기습 작전을 펼쳤으나 미수에 그친 사건을 말한다. 이날 밤 청와대 앞 300m 부근까지 접근한 북한군은 최규식(1932~1968) 당시 종로경찰서장에게 발각돼 총격전과 함께 도주했다가 29명은 사살, 1명은 북으로 도주, 1명은 생포됐다.     


국민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긴 청와대 기습사건 이틀 후 원산 앞바다에서 미 해군 정찰함 푸에블로호가 북한군에 나포된 사건이나 1968년 10월 30일~11월 2일 무장 공비 120명이 경북 울진 삼척 지역에 대거 침투한 사건도 학생 군사훈련 부활의 계기가 됐다.     


1969년부터 주 2시간씩 의무 군사훈련을 실시한 고등학교 교련 교육은 1997년 12월 제7차 교육과정 때 선택과목으로 바뀐 데 이어 2011년 완전히 폐지됐다.     


 연간 68시간의 고교 군사훈련은 필수 과목으로 배정됐으며 고교 3년 내내 위관급 또는 영관급 예비역 장교 출신들이 교육을 담당했다.      


총검술 훈련에 한창인 학생들. <사진=대건고 30회 졸업 앨범>


#얼룩무늬 흑백 교련복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난 첫 교련 시간. 학생들은 자기 몸에 맞는 얼룩무늬 흑백 교련복을 차려입고 먼지가 펄펄 나는 맨땅 운동장에 집합했다. 빡빡머리나 스포츠머리에 교련복 차림의 학생들은 교복을 입었을 때처럼 멀리서 보면 그 얼굴이 그 얼굴이라 누가 누구인지 모습을 분간할 수 없었다.      


난생처음 보는 교련복은 교복과는 다르게 낯설어 우스꽝스러웠는데, 학생들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낄낄대기도 했다. 교련복에 새겨진 문양이 개구리를 닮아서인데, 그때부터 학생들은 교련복을 개구리복이라고 불렀다.     


교련복은 예비군들이 훈련할 때 착용하는 예비군복과 흡사했고, 예비군들도 자기들끼리는 개구리복이라 불렀다.     


#교련 수업의 복장 규정

 교련 수업의 복장 규정은 제법 그럴듯했다. 교련복 외에 탄띠라 불린 벨트와 각반, 앞가리개, 흰 목장갑으로 모양을 냈다. 교련 모(帽)는 따로 없어 교모(校帽)로 대신했고 신발도 평소의 운동화를 그대로 신었다. 특이한 것은 발목 부위에 차는 각반이라는 천으로 된 부속 장구(裝具)였다.      


천에 달린 여러 개의 쇠 클립에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끈을 걸어 조여 매 훈련할 때 바짓가랑이가 거치적거리지 않도록 고정하는 역할을 했다. 군복 밑단에 차는 링의 대체 장구였던 셈이다.     


앞가리개는 스카프처럼 목에 둘러매는 흰색 천 장구다. 평상시에는 쓸모가 없이 교모 챙 위에 맥 빠지게 얹힌 턱끈도 교련 수업 때 값어치를 했다. 턱끈을 내려 턱 밑에 고정함으로써 훈련 도중 교모가 벗겨지는 것을 막는 데에 유용했고, 군사훈련 복장의 위용을 높이는 차림새에도 도움이 됐다. 교련 간부 학생들에게는 군화처럼 생긴 별도의 신발이 제공됐다.     


엎드려 쏴, 자세를 취하고 있는 학생들. <사진=대건고 30회 졸업 앨범>


#비 오기만을 기다린 교련 수업 날

 교련 교육은 이론과 실기, 두 가지를 병행해 이뤄졌다. 이론 교육의 교재는 국방부에서 제작한 국정교과서였고, 교재 이름도 교련이었다. 이론 교육보다 실기 교육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비가 오면 교실에서 진행하는 이론 수업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어 교련 수업이 있는 날이면 학생들은 은근히 비가 내리기를 바랐다.      


교련 수업이 있는 날에는 교련복을 따로 갈아입기가 귀찮아 교복 속에 교련복을 입고 등교하는 일이 많았다.     


#기초군사훈련의 축소판

실기 교육은 논산훈련소 훈련병들이 받는 기초군사훈련의 축소판이나 다름없었다. 유격 훈련과 사격 훈련, 행군(行軍)만 없을 뿐 기초군사훈련의 구색을 거의 다 갖췄다.


군인으로서 지켜야 할 규율과 행동의 절도를 배우는 제식(制式)훈련과 총검술, 화생방, M1, M16 소총 분해결합을 가르치는 화기학(火器學), 경례법, 지도를 읽는 독도법(讀圖法), 각개전투와 경계근무, 수류탄 던지기, 공격 전술과 방어 전술 등 전술학(戰術學), 열병(閱兵)과 분열(分列)로 이뤄진 사열(査閱) 훈련, 야전 위생 및 구급법 따위였다.      


학생들은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실제 사격을 한 번만 해봤으면, 하는 몽상(夢想)을 아주 버릴 수는 없었고, 그 몽상은 논산훈련소에 입소해서야 비로소 구체적인 현실로 구현됐다.     


교련 시간 총검술 때 학생들에게 지급된 소총은 훈련용 모형이었다. 고무나 플라스틱 따위의 합성수지로 실물을 본떠서 만든 M1 또는 M16 교육용 소총이었다. 소총의 무게는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고 언제부터 사용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군데군데 표면이 긁히고 벗겨지고 색이 바랜 것이 총 다운 낌새를 느끼기 어려웠다.     


교내에서 실시한 열병식(閱兵式) 장면. 열병식은 부대를 정렬해 부대원들의 사기와 훈련 및 장비 관리 상태를 검열하는 의식이다. <사진=대건고 30회 졸업 앨범>


#교련 선생들의 신기한 별명

 우리 학교에는 학년마다 교련 선생이 한 명씩 있었다. 세 분 다 학생들이 지은 별명이 있었고 우연인지 작위적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세 별명 간의 연관성이 뚜렷해 학생들도 신기해했다. 1학년 교련 선생의 별명은 올챙이, 2학년 선생은 개구리, 3학년 선생은 두꺼비였다. 마치 생태계 먹이사슬의 위계질서를 염두에 두기라도 한 것처럼 교련 선생들의 별명에도 서열 관계가 반영됐다.      


더욱 놀라운 것은 교련 선생들의 별명이 각자의 생김새나 행동거지와 너무 잘 어울렸다는 점이다. 교련 수업 때마다 선생들은 알 리가 없었을 테지만 학생들은 키득키득 웃음을 참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난다.      


고3 수험생일 때도 교련 수업은 예외가 없었고 그해 초여름 대구시민운동장에 대구지역 고교생들이 모여 대규모 사열(査閱)식도 치렀었다.     


 시대 상황에 대한 의미 부여를 걷어낸다면 고등학교 시절 교련 수업도 그리운 추억의 한 토막으로 간직할 만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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