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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권 Feb 20. 2024

학창 시절 풍속사(風俗史)

33. 고등학교 수학여행과 국산 보드카 하야비치

고등학교 수학여행과 국산 보드카 하야비치     


#70년대 수학여행지

 학창 시절 추억의 보물창고, 수학여행에 관한 이야기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전교생이 참가하는 체험 학습 여행인 70년대 수학여행 장소는 뻔했다.      


학교가 소속된 지역별로 여행지가 달랐으나 역사 기행을 경험할 수 있는 명승지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당시 고등학교 수학여행지로 인기가 많았던 곳은 설악산과 경주, 속리산 일대였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대구지역 고등학교에서는 거의 다 설악산과 가까운 속초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2박 3일 일정의 수학여행 코스는 속초 바닷가를 베이스캠프로 동해(東海)와 가까운 외설악을 거쳐 인근의 천년 고찰(古刹) 낙산사(洛山寺)를 탐방하는 내용이었다.


대구역에서 출발한 기차를 타고 동해 해안선을 따라 길고 지루한 북진(北進)을 하던 우리는 삼척~강릉을 지나 목적지인 속초역에 도착했다.     


외설악 비룡폭포. Irma2403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선로 전환 방식, 스위치백

기차 여행 도중 특이한 경험을 한 기억이 있는데 일명 스위치백(switch back)이라고, 후진 후 다시 전진하는 운행 방식이었다. 삼척시 도계읍을 통과할 때 기차가 한참을 후진했다가 다른 쪽 선로로 바꿔 다시 전진하고 후진하고 전진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해 학생들 모두 어리둥절했다.      


스위치백 전에는 기차가 잠시 멈췄는데 기관사가 직접 안내 방송을 통해 승객들을 안심시키기도 했다. 스위치백 운행은 영동선 삼척시 도계읍 심포리역~흥전역~나한정역~도계역 구간에서 이뤄졌다.


스위치백은 경사가 심한 험준한 산지를 오르내리기 위해 고안된 선로 전환 방식이다. 레일과 바퀴 모두 쇠로 제작된 열차는 물체의 운동을 저지하는 저항력 즉 마찰력이 떨어져 오르막이나 내리막을 지나갈 때 미끄러지기 쉽기 때문이다.


#외설악과 낙산사

 속초의 한 허름한 여관에 여장을 푼 이튿날, 우리는 외설악의 주요 비경(祕境)을 감상하며 설악산이 왜 제2의 금강산인지를 실감했다. 날카롭고 뾰족한 산봉우리와 맑고 차가운 물로 유명한 외설악의 풍경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비선대와 비룡폭포, 울산바위, 흔들바위 등 말로만 듣던 명소(名所)를 직접 보는 눈 호강을 한 뒤 하산 길에 낙산사를 찾았다.     


동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들어앉은 낙산사는 서기 671년(신라 30대 문무왕 11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관동팔경 중 한 곳이다. 서기 786년(신라 원성왕 2년) 화재로 사찰 대부분이 소실(燒失)된 뒤 1467년 조선 7대 왕 세조의 지시로 중건(重建)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높이 16m의 해수관음상과 해안 절벽 위 정자로 동해안 일출 명소인 의상대, 보물 제499호 칠 층 석탑(七層石塔),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보물 1723호 공중 사리탑(舍利塔) 등이 사찰 경내(境內)에 있다.     


설악산 울산바위.

문화재청/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5,01000000,32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묵인된 몰래 음주 시간

 저녁 식사 후 자유 시간. 방별로 알아서 휴식을 취하라는 자유 시간은 곧 몰래 음주의 시간이었다. 사달은 이때 벌어졌다. 음주(飮酒) 불가(不可)라는 구두(口頭) 엄명(嚴命)은 허울뿐이라 지켜질 리 없었고, 수년간의 경험으로 선생님들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선생님들은 이따금 학생들의 숙소 이 방 저 방의 문을 열고 방 안 기색을 살피곤 했으나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점검에 지나지 않았다. 방 안에서 풍기는 술 냄새를 선생님들이라고 모를 리 없었을 텐데도 사고 치면 안 된다, 한마디를 했을 뿐, 이렇다 할 제재는 없었다.     


학생들은 끼리끼리 숙소 방에서 술을 홀짝거렸고, 선생님들도 숙소 내 모처에서 술을 마셨다.     


 숙소 방에서는 스릴감 넘치는 음주 파티가 은밀하게 벌어졌다. 방마다 음주문화는 달랐다. 맥주와 소주가 대세였고 술과 안주는 다들 알아서 잘들 챙겼다.     


#국산 보드카, 하야비치

우리 방 룸메이트 중 한 명은 어떻게 구했는지 국산 보드카 몇 병을 호기롭게 꺼내놓았다. 보드카를 처음 본 우리는 신기해했고, 병 모양은 더 신기했다. 보드카를 개봉한 뒤 군용 수통(水筒)을 닮은 물병에 가득 채웠다. 일어선 채 어깨동무를 한 우리는 순번을 정해 한 사람씩 노래를 부르면서 방안을 돌았다. 자기 차례 직전이나 자기 차례가 끝난 직후 물통에 입을 대고 한 모금씩 보드카를 들이켰다.     


난생처음 마셔본 보드카는 독했고 입 안이 얼얼하고 화끈거렸다. 보드카를 공수해 온 아이가 가르쳐준 대로 우리는 돌아가면서 술 한 모금 마시고 물 한 모금을 마셨다. 본 것도 처음이고 맛본 것도 처음인 보드카는 아무 맛도 없었다. 혀끝이 타들어 가는 듯 따가웠고 속에서는 열이 났다. 술맛을 알 리 없는 우리는 술맛도 모르면서 술을 마신다는 객기에 취하고 술에 취하기 시작했다.     


수학여행 한 해 전에 국내에 유통된 국산 보드카는 이름도 유별났다. 하야비치(Hayabich)란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온 보드카는 롯데주조(현 롯데칠성음료)에서 1978년에 처음 출시한 알코올 성분 35%의 무색(無色), 무미(無味), 무취(無臭)한 술이었다.      


보드카는 원래 추운 지방 사람들이 추위에 언 몸을 녹이기 위해 마시는 독한 증류주로 색깔이 없고 맛이 없고 향이 없는 게 특징이다. 문헌상 보드카의 유래는 12세기 러시아로 알려져 있으며 보드카란 이름이 상표로 사용된 것은 18세기부터라고 전해진다.      


동해 해안 절벽 위에 있는 의상대. Steve46814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하야비치 신문 광고

 1979년 일간지에 실린 하야비치 광고 내용을 요약하면 이랬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술, 증류 과정을 거친 후 자작나무 숯으로 수십 번 걸러 만든 정통 마일드 보드카, 알코올 성분 35%, 무색의 투명한 술, 부드럽고 뒤끝이 깨끗한 술.      


79년 기준 하야비치 소비자가는 360ml 한 병에 1,000원이었다. 광고대로라면 술 마신 다음 날 숙취가 없다는 말인데 술꾼치고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독주를 처음 마셔본 나나 친구들은 특히 더 그랬다.      


#방전된 기억회로

몇 순배(巡杯)가 돌고 얼굴이 불콰해지자, 화장실을 갔다 오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나도 이미 취기가 올랐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물통을 찾는 횟수가 잦아졌고 어느 순간 필름이 끊겼다.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내가 기억을 되살리기는 만무(萬無)하고, 다음날 반장이 들려준 얘기를 토대로 전날 밤 상황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술기운의 포로가 된 나는 이때부터 육체적으로만 깨어있을 뿐 정신적으로는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 갇혔다. 기억회로를 지탱하는 에너지가 완전히 방전된 나는 몸이 시키는 대로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오장육부를 할퀴고 들어온 알코올의 공세에 의식의 엔진이 꺼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한 본능적 몸부림이 내 몸을 끌고 간 곳은 숙소 앞 바닷가였다.     


5월 동해(東海)의 밤공기는 비릿하면서 서늘했을 터. 백사장 모래 위를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갈지(之)자로 헤매었을 나는 파도가 발목을 적셨다, 말기를 되풀이하는 곳에 엎드려,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내며 속을 게워 내고 있었다.      


수학여행 중 찍은 기념사진. <대건고 30회 졸업 앨범>


#밤 바닷가에 울려 퍼진 지리 선생의 별명

 만취(滿醉)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나를 다행히 우리 반 반장이 발견하고선 둘러업었다. 기진맥진한 나를 등에 업고 숙소로 돌아오던 반장은 내 몸이 보기보다 무거워 놀랐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지리 선생의 별명을 외치고 또 외쳐 한 번 더 놀랐다고 나중에 내게 말했다.      


술에 취해 기억력을 상실한 내 입에서 바닷가 너머로 퍼져 나간 지리 선생의 별명을 주변 학생들이 다 들었고, 학생들이 다 들은 내 목소리를 지리 선생만 못 들었을 리는 없을 것이었다.      


반장의 말에 따르면 지리 선생도 현장 근처에 있었을 것이라 밤바다에 메아리친 당신의 별명에 신경이 거슬렸을 텐데도 끝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점이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숙소로 들어온 나는 쓰러진 채로 잠이 들었고, 숙소 밖 야외 간이무대는 곧 시작될 장기 자랑 준비로 부산스러웠다. 곤드레만드레 취한 내가 역한 술 냄새를 풍기며 잠든 사이 숙소 바깥에서는 필살기를 꺼내든 학생들의 숨은 재능에 친구들이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을 것이다.      


이튿날 아침, 전날 밤에 일어난 사태의 전모를 알게 된 나는 큰일 났다 싶었다. 술에 취해 나도 모르게 저지른 작태(作態)가 걱정스러워 쓰린 속이 더 쓰렸다. 하는 수 없이 담임 선생에게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는데 어젯밤에 다 해결됐다. 신경 쓸 거 없다며 씩 웃으시는 게 아닌가.      


낙산사 칠 층 석탑. Steve46814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지리 선생과 모기

 지리 선생의 별명은 여름밤의 불청객, 모기(mosquito, 머스키도)였다. 체형이 가냘프고 안경을 쓴 모습이 그놈을 닮아서였는데 하필이면 그날 그 별명이 튀어나왔을까,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내가 지리 선생의 별명을 대놓고 소리쳐 부를만한 숨겨놓은 속사정이 있을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취중에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일수록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는데 지리 선생과의 인과관계는 도무지 성립하지 않았다.     


수학여행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지리 수업 시간만 되면 마음이 불편했다. 지리 선생은 가끔 뜬금없이 내 자리 바로 옆 통로에 서 있을 뿐,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선생은 내 자리 옆에 서 있는 것으로 할 말을 대신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이 자리를 빌려 큰형님뻘 되는 지리 선생께 송구한 마음을 전한다.      


 그날 이후로 내 별명은 하야비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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