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향해 쏴라>에서 부터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까지
영화를 고르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감독이 누구인지가 기준이 될 수도 있고, 출연 배우를 따지는 사람도 있다. 영화 제목도 한 몫한다. 영화를 선택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아닐지라도 '찰진' 제목은 분명 관객의 구미를 당긴다.
어릴 적부터 영화를 워낙 좋아한 데다 통번역을 업으로 하고 있다 보니 우리말로 번역된 영화 제목을 눈여겨보게 된다. 기발하고 센스 넘치는 번역으로 원제보다 영화의 매력을 오히려 더 잘 담아낸 영화 제목을 접하는 일은 그 자체로도 즐겁다. 그런데 그 소소한 낙도 예전보다 현저히 줄어든 듯하다. 단지 번역이 부실해진 정도가 아니다. 원제를 음차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불친절을 넘어 성의 없다는 인상마저 든다. 배급사에서 과연 영화를 끝까지 봤을까 싶은 경우도 있다.
한 번에 이해되지 않는 영화 제목 문제 있다.
현재 개봉 중인 외국 영화 제목을 보자. <엘리멘탈>,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보 이즈 어프레이드>, <플래닛>, <파이어하트>, <애스터로이드 시티>, <플래시> 등 음차한 제목이 수두룩하다. 그 와중에 <슬픔의 삼각형>이 눈에 띈다. 작년 칸 영화제황금종려상 수상작인 <Trinagle of Sadness>마저 '트라이앵글 오브 새드니스'로 개봉되나 싶었는데 그나마 다행이다. 권위 있는 수상작이라고 해서 우리말로 번역이 되는 호사(?)를 모두 누리는 것은 아니다.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2022)만 봐도 그렇다.
<양자경의 더 모든 날 모든 순간>이라는 제목이 채택되는 가 싶더니 결국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개봉됐다. 그렇다고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라는 원제가 우리말로 번역하기 쉽지 않은 까다로운 제목도 아니다. 순식간에 온 우주에 (중국), 우주를 구한 이상한 여자 전사(홍콩), 빌어먹을 다중우주 (대만), 다중 우주 전쟁(베트남), 모든 곳에 동시에 (아르헨티나), 모두, 어디에나, 동시에 (헝가리)의 예에서 보듯 재치 있게 적어도 원래 제목에 충실하게 번역해서 얼마든지 우리말로 소개할 수 있었다.
우리말로 번역한 제목으로는 외국어로 된 원제의 느낌을 살릴 수 없다고? 과연 그럴까?
모국어, 우리 몸에 스며든 그 무엇
정보만을 담는 그릇을 넘어, 원초적인 정서까지 일깨우는 것이 모국어다.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 듣는 'everything'과 영단어로 배운 우리에게 'everything'이 같은 느낌으로 다가올까? 그나마 everything, everywhere 정도는 익숙한 단어라 봐줄 수 있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을 멋지게 풀어낸 영화 <어톤먼트>(2008)는 어떤가?
‘어톤먼트’를 처음 접한 관객들은 아마도 정확한 철자도 몰라서 뜻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 바에야 영어 공부라도 되게 차라리 원어'Atonement. 속죄.'로 표기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스타이즈 본>은 또 어떤가. 리메이크 영화로 이미 <스타탄생>이라는 좋은 제목이 있는데 굳이 ‘스타 이즈 본’이라니..’ 우리말 표기'본'으로는 'bone'은 몰라도 'born'을 절대 살릴 수 없다. <엔트랩먼트>,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 <인어베러월드>, <댓오쿼드모멘트>, <아이 필 프리티> 등 (너무 했다 정말!) 음차한 영화 제목은 너무나 흔해서 업계의 관성으로 굳혀진 게 아닌가라는 의심이 든다.
반대로 너무 의역해서 문제인 경우도 있다. 우디 앨런 영화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2008)가 바로 그런 경우다. 원제는 주인공 이름과 배경이 된 도시가 들어간 <Vicky Cristina Barcelona> 다. 세 남녀의 로맨스를 그리긴 했지만 엄연히 15세 이상 관람가로 재기 발랄하고 유쾌한 코미디 영화다. 그런데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라는 제목과 ‘둘이 하면 로맨틱하고 셋이면… 환상적일까?라는 야릇한 카피 문구만 보면 막장 성인물을 연상시킨다.
오죽하면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이런 평을 남겼을까.
"두 시간 내내 낄낄댈 수 있다, 제목만 참아낼 수 있다면"
그렇다면 잘된 영화 제목 번역은 무엇일까?
1. 영화의 장르와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아낼 것
2. 흥미와 호기심을 유발할 것
그런 의미에서 내가 최고로 꼽는 영화 제목 번역은 바로 고전 걸작 <내일을 향해 쏴라>(1969)다.
다시는 없을 명콤비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출연한 영화의 원제는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로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는 미 서부시대 강도로 이름을 날린 실존인물들이다. 우리로서는 잘 알턱이 없는 미국인들의 실존이름 대신 무모하지만 낙천적인 두 사람의 캐릭터뿐만 아니라 경찰과 군대의 포위망 속에서 나가면 집중포화를 맞을 것을 알면서도 총을 겨누고 밖으로 탈출하는 잊을 수 없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고스란히 제목으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 절묘한 번역이 우리 실력이 아니라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라는 점이 옥에 티다.
두 번째로 꼽는 영화는 <사랑과 영혼>(1990)이다.
시각으로 '터치'라는 촉각을 경험하게 하는 도자기 애정신으로 유명한 이 영화의 원제는 놀랍게도 <Ghost>다. 그대로 번역했다면 <유령>이나 <귀신>이 될 뻔했다. 그랬다면 많은 사람들이 납량 특집 공포 영화로 장르 자체를 오해했을 게 뻔하다. '유령'이나 '귀신'이 주는 서늘한 분위기를 싹 걷어낸 후 따뜻함이 깃든 ‘영혼’으로 원제의 뉘앙스를 보존하고 ‘사랑’을 더해 애절한 로맨스 영화로 탈바꿈시킨 빼어난 번역이라 하겠다.
성의 없는 영화 번역 제목이 넘치는 걸 보면서 그 옛날 <주말의 명화>에서 방영하는 <이유 없는 반항> 이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영화를 기다리며 두근거려했던 환상과 낭만까지 사그라드는 듯한 안타까움이 드는 건 나뿐일까?
커버사진: Unsplash의Noom Peerap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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