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첩보 멜로 <오명>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싶으세요?"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싶으세요?"
첩보 영화의 매력
첩보 영화를 좋아한다. 비밀스러운 첩보 세계에서 위험천만한 임무를 수행하는 요원들의 이야기는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007이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는 이국적인 장소, 대담한 일탈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액션과 모험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화려한 세계에 빠져들게 한다. 보다 현실적인 스파이 세계를 그린 영화도 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도 근육질의 첩보 요원이나 뇌쇄적인 미녀도 등장하지 않는다. 불안에 시달리며 지쳐있고 외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첩보 요원들이 있을 뿐이다. 연기자들의 호연과 뛰어난 연출로 영화 속 고뇌하는 첩보 요원들의 모습은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첩보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Tinker Tailor Solider Spy)> 이야기다.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싶으세요?"
그렇다면 내가 최고로 꼽는 첩보 영화는?
바로 히치콕 감독의 <오명(Notorious)>(1946)이다. 단연 최고의 첩보 영화일 뿐 아니라 지금껏 본 히치콕 영화 중에 가장 좋아하는 영화기도 하다. (단일 감독 작품으로는 우디 앨런 영화와 더불어 가장 많이 봤다).
<줄거리>
1946년 독일 나치의 스파이로 밝혀진 존 후버만은 유죄 판결을 받고 감옥에 갇힌다. 그럼에도 그의 딸 알리시아 후버만(잉그리드 버그만)은 연일 파티를 열며 자유로운 생활을 이어간다. 어느 날 알리시아는 파티에서 데블린(캐리 그랜트)을 만나고 그에게 호감을 느낀다. 알고 보니 데블린은 미국 정보부 요원이었다. 당국은 존 후버만 유죄 판결 후 그의 딸을 계속 감시하고 있던 것이다. 브라질로 가서 국가를 위해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자는 제안을 받고 알리시아는 데블린과 함께 리우데자네이루로 떠난다. 알리시아에게 주어진 임무는 아버지의 오랜 친구이자 나치 스파이의 핵심 일원인 알렉산더 세바스찬에 접근해 정보를 빼내는 것. 오래전부터 알리시아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던 알렉산더는 그녀에게 청혼하기에 이른다. 이미 알리시아와 사랑에 빠진 데블린은 ‘결혼’이라는 변수 앞에서 잠시 동요했지만 ‘국가를 위한 대사’를 그르칠 수는 없다. 결국 알렉산더와 결혼까지 감행한 알리시아는 파티에 데블린을 초대하고 그에게 중요한 단서를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알렉산더는 알리시아가 자신과 위장 결혼한 것을 알아채고 만다. 알랙산더는 알리시아에게 조금씩 독약을 먹이는 방식으로 그녀를 제거하려고 한다. 날이 갈수록 시름시름 앓게 되고 마침내 목숨이 위태로워진 알리시아.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데블린은 위험을 무릅쓰고 앨리시아를 구출하러 나선다.
[오만과 편견]을 떠올리는 첩보 멜로 걸작
영화 <오명>에는 격렬한 액션 활극도 최첨단 장비의 활약도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서스펜스, 로맨스, 음모의 요소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시대를 초월한 걸작이다. 대표적인 스파이 영화로 꼽히는 007 시리즈에도 로맨스가 등장하긴 하지만 영화 속 여인들은 제임스 본드의 하룻밤 정복의 대상이거나 본드를 위험에 빠뜨리는 팜므파탈이 대부분이다 (본드가 진짜 사랑에 빠진 건 <007 카지노 로열>이 유일했던 듯) 그에 비하면 <오명>은 첩보를 내세운 정통 멜로로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탁월하다. 다양한 캐릭터에 줄거리도 매혹적이지만 영화의 가장 큰 줄기는 특수한 상황에서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다. 그런 면에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떠올리기도 한다. 데블린은 알리시아와 사랑에 빠지지만 스파이의 딸이자 방탕한 생활을 이어온 그녀에 대한 편견과 의구심을 쉽게 거두지 못한다. 한편 알리시아는 자신에 대한 편견을 떨치지 못하고 사랑의 감정까지 의심하는 데블린을 꿰뚫고 있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싶으세요?”
"Tell me, would it interest you to know how much I love you?"
영화 전반에 흐르는 사랑과 의심 사이의 미묘한 긴장을 잘 보여주는 대사다.
결정적 순간
알리시아에 대한 의심뿐이 아니다. 데블린은 국가를 위해 일하는 정보 요원으로서 알리시아에 대한 사랑과 정보 요원으로서의 임무 사이에서도 내적 갈등을 겪는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이 오자 모든 것이 선명해진다. 알리시아의 목숨이 위태로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데블린은 그 길로 그녀를 구하러 달려간다. 사랑이 의심과 편견을 무찌르는 순간이다. 사랑과 임무에 대한 헌신이 상충할 때 결국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데블린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알리시아를 안고 탈출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첩보 영화사에서 길이 남을 명장면인 이유다.
영화에서도 우리 인생에서도 고민과 갈등 번뇌를 겪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모든 것이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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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사진: Unsplash의Killian Cartign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