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렁이 각시
찬바람이 일자 마을 사람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가을걷이로 북적이던 들녘은 이내 사람의 발길과 멀어졌고, 볏짚 더미 켜켜이 쓸쓸함이 채워졌다. 황량한 아침 들판에 첫서리가 내렸다.
미진이가 어머니를 따라 논에 나왔다. 메마르고 건조한 햇살에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다. 양손을 눈언저리에 올리고는 들판을 둘러본다.
덥수룩한 머리가 시원스레 깎인 논벌은 가리었던 민낯을 드러냈다. 농부들이 힘겹게 뗀 걸음이 사방으로 무겁게 내려앉아 있다. 저마다의 발자국이 그대로 굳어진 논바닥은 잘려나간 밑동과 어우러져 한 편의 커다란 판화가 되었다.
깊게 새겨진 발자국 밑으로 우렁이가 있다. 무더운 여름날 논물에서 한가롭게 노닐더니 어느새 우렁이 각시처럼 꽁꽁 몸을 감추었다. 바닥을 살피던 미진이가 움푹 들어간 발자국을 선택했다. 크기가 큼지막한 것이 아마도 아버지의 흔적일 것이다. 뒤꿈치 부분을 막대로 후비니 숨어 있던 우렁이가 정체를 밝힌다.
‘찾았다’
느릿느릿하기는 해도 물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던 우렁이다. 갑갑한 진흙 속에 꼼짝없이 갇혀 있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술래가 된 미진이가 이쪽저쪽 땅을 헤집다가 고개를 들었다.
차갑고 메마른 들판의 한가운데에 어머니가 서 있다. 추수하고 바닥에 떨어진 벼 이삭을 줍느라 허리 펼 새가 없다. 한 해 동안 힘들었던 농사의 수고로움을 생각하면 한 톨의 곡식도 허투루 할 수 없음이다. 구부정한 어머니의 모습은 미술책 한 페이지의 주인공을 닮았다.
해넘이가 시작되자 쌀쌀해진 날씨가 옷깃을 바짝 여미게 한다. 너른 들녘에 휘휘 몰아치는 찬 바람이 겨울을 재촉한다. 인적이 끊기어 을씨년스러운 들판에 참새떼가 날아와 자리를 지키며 주인행세다. 어머니 주위를 맴돌던 아이의 참을성이 마침내 한계에 달했다.
“엄마, 배고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둑어둑한 동네에 하나둘 불이 들어오고, 아이의 외딴집에도 환하게 전등이 켜졌다. 어머니는 서둘러 부엌으로 들어가고, 딸아이는 따뜻한 아랫목을 찾아 우렁이처럼 몸을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