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면에서 처지가 비슷하고 영업활동이라면 내 로랄만큼 이름난 입사동기 추 부장과 수시로 정보를 교환하고 대책을 협의했다. 나와 추 부장은 각자 복합점포를 이끌던 중 최근 변경된 회사의 점포전략에 따라 영업소장으로 내려앉았다. 나하고는 한 다리만 건너면 친구의 친구가 학교 선후배가 되기도 하는 막역한 사이였다. 때문에 서로의 속내를 스스럼없이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많지 않은 편안한 친구였다.
최근 복합점포장으로 재직 시 각자 양호한 실적을 거양하여 혹시나 일반점포장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있던 것도 닮은 점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점포장으로 영전하기는커녕 영업소장으로 내려앉았다. 그것도 모자라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듯이 살생부에 이름을 당당히 올렸다. 기회가 될 때마다 지역본부장은 박 부장은 곧 일반점포장이 되는 등 좋은 일이 있을 것이고 본부엔 지속적으로 추천을 해온 터라며 자주 생색을 냈다.
나는 무시 못할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양호한 영업실적을 근거로 영전 운운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라니, 이런 ’ 표변‘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나는 입사동기이자 막역한 친구인 추 부장과 본 이벤트가 끝날 때까지 잦은 연락과 정보교환 대책 논의 등을 끈적끈적하게 이어갔다.
절친 조 부장은 답답함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 노조 측에 금번 이벤트에서 이른바 살생부에 오
른 노조원(직원)들의 정리해고를 방어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배신감이 들 정도로 단호하게 그건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는 답신을 받았다. 세상에 믿고 기댈 곳은 없다고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노조 측은 한술 더 떴다. 사내 노조 게시판에 고정 고액 임금 체계에다 인사정체 해소 방안을 운운했다. 노골적으로 사용자 측의 충성스러운 최전방 도우미로 착각할 정도의 한심한 작태를 보여주었다. 근로조건의 유지와 향상, 노조원의 권익보호가 노조의 가장 근본적인 존재 이유란 사실을 망각한 처사였다. 일정한 근속연수와 연령층에 도달한 직원에게 사용자 측은 물론이고 노조도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는 어느 입사 선배의 의견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회사 측의 사전 언론 플레이 덕분에 당사의 최근 동향을 벌써 눈치챈 고액 충성고객의 식사 제안을 받았다. 혹시 박 점장도 회사를 떠날 수 있으니 본인 계좌 관련 현안 문제에 관한 확답까지 요구했다. 주위에 결코 우호적인 사람이나 세력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면초가 신세였다.
전보발령을 받은 직원 중 희망퇴직 신청서 제출을 하지 않고 있는 직원들에 대해선 또 다른
곳으로 추가 인사 조치를 반복했다. 일정한 권역을 넘어서는 발령과 달리 근거리 전보의 경우엔 발령일로부터 3일 내에 부임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 부서장 간의 합의 내지 양해로 지연되는 부임은 해결되는 것이 관행이었다.
종래와 달리 본인이 사용하던 업무용 컴퓨터 등은 본인이 직접 휴대하여 근무지로 이동했다. 컴퓨터의 철수 후 새로운 부임지에서 설치 등 작업은 협력회사 몫이었다. 발령 규모가 큰 경우엔 이 작업이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새로운 근무지로 부임하여 출근을 하고 겨우겨우 컴퓨터 등을 설치하여 나름 자리를 잡으려 하면 다시 새로이 다른 곳으로 전보발령을 냈다. 동종 업계에서 좋은 용어론 구조조정 전문가, 쉽게 풀면 칼잡이로 이미 악명이 높은 회사의 사장은 그 이름에 걸맞게 직원의 목숨을 끊어내는 데 발군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대상자들은 두려워 부들부들 떨었다. 주위 사람들도 혀를 내둘렀다.
애시당초 첫 발령지로 지방 등 원거리에 배치된 직원은 추가 이동이 없었다. 하지만 수도권역 내에서 움직이게 되는 직원들은 아주 짧은 기간에 적어도 3~4회나 되는 보복성 발령에 지쳤다. 이에 직원 스스로 두 손을 들고 마침내 백기 투항하는 걸 쉽게 볼 수 있었다. 심지어 주식
매매주문 자체를 전산으로 틀어막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이러한 잔인무도한 행태에도 그들이 설정한 최종 목표치의 달성이 쉽지 않았다. 그러자 전보발령 회전율을 높임과 동시에 극단적인 비상조치까지 단행했다. 처음 설정한 기준인 연령이나 근속 연수를 완화시켰다. 게다가 근무평정 하위 그룹에 속한 본부 직원을 추가로 살생부에 올렸다. 막장 드라마에서도 보기 힘든 일이었다. ‘두 손 들고 나올 때까지 더욱 세게 자주 돌려 ‘라, 는 아래에선 어느 누구도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사장의 지령이 추가로 떨어졌다.
희망퇴직원을 제출한 인원이 회사 측의 최종 목표치로 알려진 ●백 명선에 많이 미치지 못했다. 이에 회사 측은 직원을 어떻게 해서라도 내쫓으려고 대상자를 상대로 한 압박 강도를 한층 더 높였다. 이른바 양동작전이었다.
금융지주의 정체성을 최대한 반영하여 공문서의 제목도 '정리해고 회피를 위한 제2차 희망퇴직 시행'으로 멋들어지게 새로이 단장을 했다. 지난번과 달리 자녀 학자금 지원 부분은 없애겠다고 협박하는 등 고단수의 전략도 구사했다.
살생부를 근거로 일선 점포장이나 지역본부장 총괄본부장이 교대 또는 중복되는 전방위 압박에도 회사의 최종 목표치 달성이 녹록지 않자 살생부에 일정한 범위의 직원들을 추가로 올렸다. 우리가 영업활동 시 고객의 외연을 넓히는 일이 매우 중요한 것은 이미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세상에 살생부에 이를 잘못 응용하다니 아이러니였다.
대개 살생부에 올리는 기준이란 것이 고령자, 장기근속자, 실적 부진자, 징계 전력이 있는 자 또는 여러 사 유가 중복되는 자 들이 거론되었다. 근무평정이 좋지 않은 직원을 나이에 관계없이
살생부에 전격적으로 추가 편입했다. 심지어 만 43세에 채 미치지 못한 직원도 이른바 유
효사 거리 안으로 끌어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