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대중가수의 가사에 등장하는 ‘사계절이 뚜렷한 대한민국 어쩌구’는 발표 당시는 어느 정도 맞았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닌 것 같다. 봄이 언제 왔는가 싶으면 바로 여름이고 프랑스 어느 시인이 그렇게 간절하게(?) 사고 싶다던 가을도 봄과 형편은 별로 다르지 않다. 사람마다 계절에 대한 호 불호가 다르다. 그 중 가장 좋아하는 계절, 그 반대의 계절 등이 있다. 나는 아직도 가장 싫어하는 계절을 말하라면 ‘여름’이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다한증’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태어난지 9개윌만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내가 자신 있기 말하기 어렵다. 아버지는 엄청나게 열과 땀이 많았다.일찌기 18세에 소년 가장이 되어 집안 생계를 전적으로 떠 맡았다. 웬만한 일은 다 해본 백전노장 자수성가형 인물의 전형이었다.
아버지는 양곡상이라는 항상 몸 전체를 움직여야 가능한 이른바 극한직업에 종사했다. 지독하게 많은 땀을 흘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매일 보고 자랐다. 쌀, 보리쌀, 소금, 밀가루 등 기본 먹거리는 물론 시멘트 등도 사고 파는 일이 생업이었다. 가을에 벼를 수확하고 탈곡을 하여 나라에서 농부로부터 사들이는 "매상"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졸업시까지만 해도 우리집은 한 뙈기의 논도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매상이란 제도를 활용했다. 소위 ‘나락’을 농부에게 사들여 풍구질과 건조 등 지난한 수순을 거쳐 수매 수준에 적합하도록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그런데 매상에 달리기 직전의 최종작업에 해당되는 것이 정말 극한 직업 중의 극한 작업인 ‘매상가마니 묶기’였다.
매우 가볍고 부피도 작고 질긴 소위 포대를 사용하는 지금과 달랐다. 당시는 볏집으로 날줄과 씨줄을 엮고 아가미에 해당되는 출입구를 제외한 세변 테두리는 담겨질 곡식의 무게를 감당할수 있도록 새끼로 또 한번 마감질을 한 ‘나락가마니’를 사용했다. 가마니 자체의 부피와 무게만도 무시 못할 정도였다.
일반적으로 추곡매상이란 게 가을 추수가 끝난 나락을 나라에서 사들이는 제도이기 때문에 늦가을에 이루어졌다. 우리 형제들의 놀이터이자 추억의 공간이었고 나중엔 부모님께서 해로했던 창고집의 콘크리트 바닥이 아버지의 매상 가마니 묶는 극한 작업의 현장이었다.
작업물량이 아주 많은 경우를 제외하고 아버지는 전신의 모든 근육을 다 동윈해야 하는 그 극한 작업을 오로지 홀로 감당했다. 여러 날에 걸쳐서 그 일을 밤낮 가리지 않고 해냈다. 하루 작업량은 줄잡아 50 가마니 내외였다. 그 극한 작업 시 아버지의 복장은 독특했다. 아래는 국방색에 유난히 통이 넓은 군용 바지였고 상의는 달랑 면 넌링셔츠 한 장이었다. 바지 뒤쪽 오른쪽 허리춤엔 작업중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는데 필수품인 수건을 장착했다.
정해진 중량을 어림잡아 우선 빈 가마니를 추억의 ‘앉은뱅이저울’에다 올려 놓고 대략 가늠을했다. 그런 다음 짙은 고동색 고무 재질에다 손잡이가 달린 투박한 바가지로 벼를 덜어내거나 추가로 담는 미세조정을 했다.
이어 본격적인 ‘매상가마니 묶기’ 작업이 시작되었다. 우선 가마니 입구를 틀어 막고 주로 막일을 하는 건장한 성인 남성의 긴 손가락만한 굵기의 새끼줄을 두줄 단위로 하여 가마니의 가로 세로로 각각 두줄로 묶어냈다. 중간지점 쯤에서 한번 더 감는 방식으로 결박을 했다. 적당한 길이로 새끼줄을 자르기 위해 낫이나 아버지가 열쇠뭉치와 갈이 묶어 늘 소지했던 군용맥가이버 칼은 당연히 항상 준비되었다.
새끼줄은 규격화된 타래를 사용했는데 손으로 당기면 엉키지않고 실타래가 그렇듯이 자연스럽게 풀려나왔다. 완성된 매상가마니는 창고 한편에 5단 내외로 차곡 차곡 쌓았다. 이 작업 역시 다른 장비의 도움 없이 맨몸으로 했다. 아버지가 그 극한 작업 중 흘리는 땀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그야말로 땀이 장마철 집중호우시 내리는 장대비를 방불케 했다. 런링셔츠가 백옥같이 뽀얀 타고난 피부에 근육질로 단련된 상체에 찰싹 달라붙어 장엄한(?)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났다. 런닝을 벗어 빨래 후에 물을 짜듯이 반복해서 짜낸 땀을 하루 정도만 모아도 국수를 담아내는 큰 놋대접을 충분히 채울 수 있었다.
이런 극한 작업을 하는 아버지에게 초등학교 저학년 이 집 차남은 철이 없게도 "아버지 공책(연필)사게 돈 좀 주세요" 라며 다가섰다. 남달리 교육열이 높은 아버지는 남자 바지의 앞부분 왼쪽에서 오른쪽의 4분의 3 지점의 벨트라인 바로 밑에 있는 동전 전용 주머니에서 거북선이 새긴 은색의 오십환(오원)동전 하나를 꺼내어 얼른 건넸다.
"아이구 그래 우리 아들이 공부한다는데"
이 뿌리가 깊고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다한증을 이 집 차남인 나는 다른 형제자매들과 달리 통으로 온전하게 물려받았다. 평소 유독 땀이 많은 차남을 부모님은 걱정을 하며 ‘쟤는 저렇게 물러터져서 참 큰일이다’곤 했다. 당시 우리 집안의 희망이자 대들보인 장남은 어릴 때 녹용을 먹였는데 둘째는 녹각도 먹이지 않아 그런 것 같다. 그 때 무리를 해서라도 먹였어야 한다며 혀를 끌글 찼다.
300번지에서 20리 내외 반경에 외가를 둔 우리는 특히 여름방학이면 그 곳에 자주 놀러 갔다. 한 번은 ‘감옥’이라는 지명도 독특한 외가집 밭에 모여 나보다 1년 후배인 외숙모의 남동생과 같이 쟁기의 양쪽에 줄을 매어 끌고 가는 일소 역할을 했다. 그 후배와 달리 엄청난 땀 때문에 안절부절하는 날 지켜보던 외삼촌 내외가 걱정을 했다. 나는 체력이 약하다는 뜻으로 들려 조금은 속이 상했다.
30대 후반에 갈은 회사의 입사동기와 같은 지점의 바로 옆자리에 근무를 하는 흔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나와 달리 그 친구는 더위를 거의 타지 않았다. 한 여름의 무더위를 실내 커다란 에어컨의 가동으로 해결하고자 내가 스위치를 계속 ON으로 하면 그 친구는 어느새 다시 OFF로 바꾸는 이른바 ‘시소놀이’가 계속되었다. 결국은 그 친구가 나 때문에 냉방병에 걸렸다.
얼마 후엔 양복저고리 두벌 실종 사건이 일어났다. 행주산성 인근의 음식점에서 지점 회식이 있었다. 나는 실내에 들어서면 일단 계절에 관계없이 저고리든 무엇이든 일단 상의를 우선 벗어 던졌다. 그날도 예외가 아니었다.
맛있는 음식에 술을 곁드려 동료들과 즐겁게 담소를 즐겼다. 어느덧 회식 자리를 파할 시간이 되었다. 음주운전은 피해야했다. 택시와 대리운전을 릴레이로 이용하여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다음날도 나는 평시와 다름 없이 정시에 출근했음은 물론이다. 문제는 의자 등받이 부분에 당연히 걸려 있어야 할 양복저고리의 행방이 묘연했다. 택시 안에 두고 내렸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래서 고양시에 회사적을 두고 있는 택시회사 마다 모두 수소문을 했다. 그래도 집나간 저고리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 이후가 더 문제였다. 우리집 내무부장관한테 질책을 받을 생각을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잔머리를 좀 굴려서 해결책을 고민했다. 내가 당해 양복을 구입한 곳에 문의했다. 안타깝게도 단종된 상품이라는 답신이 돌아왔다. 다시 가리봉동 인근에 모여 있는 상설 할인 매장에 문의해 보았으나 결국은 집 나간 저고리의 대용품도 구할 수 없었다. 양복 바지 오른쪽 뒷주머니 속에 달린
네모난 작은 천 조각에 새겨진 고유번호가 각각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그나마 작은 소득이었다.
다른 조직과 달리 우리 회사는 근무복장으로 콤비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른바 싱글만 입을 수밖에 없어 결국은 두벌의 바지는 희망퇴직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전사적인 회사 체육대회가 있었던 날이었다. 행사가 파하고 양복 정장인 근무복을 다시 차려 입었다. 신촌 인근에 있는 지점장의 단골 주점으로 직원 넷이서 뒷풀이를 위해 발길을 돌렸다. 그 곳의 새끼 안주인은 안타깝고 영리하지 못하게도 점포장 이외에는 자신들의 손님으로 보지 않는 우둔한 응대를 했다. 나는 비분강개했다. 당시 주점을 나와 24시간 영업을 이어가던 뼈다귀 해장국집에 들러 쓰디 쓴 소주를 추가로 몇 병 비웠다. 나는 그날도 역시 대리운전이라는 참 좋은 시스템의 고마운 값어치를 느끼며 안전하게 귀가했다. 역시 다음날 출근했는데 앞선 사례와 어쩌면 그렇게도 똑 같은 사태가 발생했다. 그 어린 새끼 안주인에게 스트레스를 받다보니 저고리를 또 챙기지 못한 것 같았다.
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다한증 유산은 불행히도 나의 장남이 확대 발전시켜서 새로운 버전으로 업그레이드 시켰다. 2012년 겨울 큰 아들의 대학교가 결정되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인천의 집에서 통학을 고집하는 집사람과 달리 아들은 원룸 자취를 간절하게 원했다. 이 다한증 유산은 큰 아들이 집사람에게 자취를 시켜달라고 조를 때 가장 설득력 있는 무기가 되었다. 전철과 버스를 여러번 갈아타고 등교를 해야 하는데 너무 많이 흐르는 땀을 감당하지 못해 주위 승객에게 엄청난 민폐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얼마후 공군에 입대하기 전 분당 소재의 한 대학병원을 들러 다한증의 해결책을 찾고자 했다. 아버지와 나의 다한증에 관한 이력을 듣고 난 전문의는 약을 복용하지 않고 증상이 누구러지는 아빠 나이 정도까지 버티거나 아니면 미국 FDA가 시판을 허용한 총 3종의 고가 희귀약품 중 하나 이상을 복용하든가 택일하라는 주문을 했다.
무어 거창하게 ‘에너지 총량불변의 법칙’이니 하는 걸 빌지 않더라도 세상의 이치는 간단 명료한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사람마다 땀이 많이 나는 부위가 달라서 그에 맞는 처방을 하면 그 쪽은 증상이 어느 정도 완화될 수 있지만 다른 부위는 또 그 상당량만큼 땀이 늘어난다고 했다. 이 다한증도 결국은 불치병 중의 하나인가 보다.
나는 다한증 때문에 양복저고리를 2벌씩이나 가출시키는 대단한 일을 저질렀다. 그래도 자신 있고 부끄럼 없이 이야기 할 수있다.
" 양복 바지 4벌은 집을 내보내지 않았고, 잘 간수하고 있다고, 다만 희망퇴직으로 퇴출되었을 따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