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장이 더 이상 자연스럽게 들리지 않는다.
그보다는
“퇴직하셨다며? 요즘 어떠세요?”
“무슨 일 하세요 요즘엔?”
혹은 아예 조심스럽게 묻지도 못하는 분위기.
퇴직은 축하의 대상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걱정거리가 되어버렸다.
퇴직을 말하면 ‘여유’보다는 ‘불안’이 먼저 떠오른다.
“앞으로 뭐하시려고요?”
“국민연금만으로 살 수 있어요?”
“창업은 안 하세요?”
퇴직 이후를 계획해야 한다는 말이
퇴직 그 자체를 축하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퇴직자는 온전한 축하를 받지 못하고,
젊은 세대는 퇴직을 막연한 두려움의 단어로 받아들인다.
아직 20대인데도, 30대인데도
“퇴직 이후에 뭐 하고 살지?”를 고민하는 사람들.
그건 성실함이 아니라 무기력함에 가까운 고민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퇴직 이후에도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기업의 대리입니다."
"나는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이제는 그 문장이 사라진다.
남는 건
"나...는?"
우리는 직업을 자기 정체성으로 여긴다.
직장이 없으면 나도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직장을 떠나는 순간
삶의 무게감까지 함께 잃어버린다.
퇴직 이후의 삶을 무게 있게 설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일이 없는 사람’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너무 크다.
그 시선이 고스란히 부모님에게,
그리고 미래의 우리 자신에게 향한다.
퇴직 이후에도 여전히 ‘일’을 해야
존중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회.
그 믿음이 결국
퇴직을 ‘축하할 수 없는 이벤트’로 만들어버렸다.
우리는 퇴직을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퇴직은 ‘멈춤’이 아니라 ‘전환’이다.
월급을 받는 사람에서, 삶을 디자인하는 사람으로.
일에 속한 사람에서, 삶의 주인이 되는 사람으로.
그러기 위해선 준비가 필요하다.
돈보다, 시간보다 중요한 건 관점이다.
직장 없이도 나를 설명할 수 있는 한 문장을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자연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사람이에요.”
“나는 아직도 배우고 싶은 게 많은 사람입니다.”
이런 문장이 한 줄쯤은 있어야
일을 그만두어도 삶은 계속된다는 걸 증명할 수 있다.
즉, "일"과 "나"를 분리해야한다는 것이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회사의 일"과 "나의 일"을 분리하는 것이다.
회사는 이것을 동일하게 만들고자 노력하는 것이고("회사의 일" = "나의 일" → 몰입)
개인은 이것으로부터 균형을 잡는 것이 필요하다.
축하받을 수 있는 퇴직은 결국
퇴직 이후의 삶을 삶답게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퇴직이 축하받는 순간으로 회복되기를,
그리고 퇴직 이후의 삶이 ‘줄어드는 삶’이 아닌
‘깊어지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