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
무더운 하루가 가고 선선한 바람이 한낮의 더위에 찌든 나를 서서히 식혀 주는 밤이었다.
오랜만에 영수와 상철을 판교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다. 일주일 전 한동안 식어있던 단톡방에 영수가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 다들 안녕하신가?
항상 우리 중 물꼬를 트는 건 영수였다.
- 하이! 어쩐 일이야? 잘 살아 있지?
나는 반가움과 호기심이 섞인 인사말을 건넸다.
- 슬슬 회동할 때가 되지 않았어? 봐야지!
- 좋아.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차였어. 보자. 근데 상철은 살아있나? 답변이 없네.
- 살아있다. 오버
이렇게 우리 셋은 일 년 만에 모이게 됐다.
7월의 습한 더위는 조금만 움직여도 등골에 땀이 차오르는 장마의 한가운데에 있다. 집 안 베란다에 해가 잘 들지 않아 빨래가 꿉꿉하게 느껴지기에 제습기를 틀어놨더니 일주일 만에 제습기의 큰 물통에 물이 찰랑찰랑 찼다. 가끔 물이 찬 제습기의 물통을 보면 너무 신기하기만 하다. 이 물들은 정말 어디서 온 걸까 하는 의구심에 삶이 참 오묘하게만 느껴진다. 눈에 보이지 않던 공기 중의 작은 수분이 어느 순간 이런 물이 된 걸 보니 차곡차곡 쌓여가는 나의 인생도 미세한 수분이 모여 고인 물이 되면 비워줘야 하는 게 아닐까. 변기에 흘려보낸 물들이 왠지 떠나가는 연인처럼 괜스레 붙잡고 싶어 진다.
- 잘 가라, 물들아.
- 잘 가라, 과거의 내 인생아.
우리가 모인 곳은 판교역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냉동 삼겹살 집이다. 유행은 돌고 돈다더니 생삼겹살을 선호하던 사람들이 이젠 얇아서 빨리 익는 냉동 삼겹살의 맛을 다시 찾고 있다. 우리는 쿠킹포일을 깐 옛날식 불판에 냉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삼겹살을 올려서 굽기 시작했다. 고기는 얇아서 올려놓자마자 바로 하얗게 익어간다.
상철과 영수는 아직도 웃으면 천진함이 느껴지는 소년미가 물씬 풍긴다. 그들도 이제 곧 사십을 바라보는 나이인데 아직도 소년스러움이 남아 있다는 게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마음의 때가 아직 덜 탄 덕분일까 혼자서 생각해 본다.
상철은 조용하고 부드러운 성격에 남에게 웬만해선 싫은 소리도 못하고 큰소리도 내지 못하는 남자치고는 좀 여린 면이 있지만 각 잡고 일할 때면 전문성이 물씬 풍기는 개발자이다.
영수는 언변이 화려하고 농담도 즐길 줄 알면서 타인에 대한 따뜻한 말 한마디나 눈빛을 건넬 줄 아는 여유가 있지만 일에 매진할 때면 더없이 차게 느껴지곤 하는 기획자이다.
2년 전에 회사의 경영난으로 사업을 축소하면서 대량 인력들이 밖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같이 일하던 팀이 없어지고 갈 곳이 없는 동료들은 2년 치의 월급을 받고 결국 희망퇴직을 하게 되었다. 상철은 다행히도 불러주는 곳이 있기에 그리로 가서 일을 하게 되었지만 어째서인지 새 팀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결국 그도 희망퇴직을 신청하게 되었다. 그리곤 작은 중소기업의 개발팀에 들어가서 일을 하고 있다.
반면 영수는 능력에 비해 일에 대한 보상도 적게 느껴지고 잦은 부서 이동과 업무의 변경에 소모품처럼 느껴지는 자신의 상황에 비참함을 느끼고 이직을 마음먹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이직을 준비하고 바로 S사의 경력직 광고에 지원하게 됐는데 그게 덜컥 되고 말았다. 그게 일 년 전이었다.
각자 다른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우리가 영수의 호출에 일 년 만에 모인 것이다.
아마도 영수가 보잔 얘기가 없었으면 우리는 그렇게 평생 서로의 과거 속에 남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가끔 그들의 소식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이미 나와는 다른 길을 가는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소식을 묻기가 껄끄럽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그래도 연락이 오니 반갑고 어찌 사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지글거리는 삼겹살을 구우면서 영수가 나에게 안부를 묻는다.
- 정숙이 너는 여전하네. 회사 절대 나오지 말고 계속 버텨라.
- 너는 나가놓고 나보곤 버티라니 모순 아니냐?
- 그래 정숙아, 너는 계속 다녀. 나와보니 그때가 좋았구나 싶더라.
상철이 예전처럼 따스한 목소리지만 어딘지 쓸쓸한 듯 말을 건넨다.
- 뭐야, 니들이 좋아서 나갈 땐 언제고 이제 와서 후회라니. 떠난 애인은 잊어버려.
오랜만에 만났지만 금세 우리는 어제 만난 사이처럼 술과 함께 분위기도 추억 속으로 젖어 들어갔다. 말끝마다 그때 우리 좋았는데라고 말하는 우리가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영수나 상철은 새로 들어간 회사도 결국 일해보니 별반 다를 게 없단다. 그나마 동기들이 있던 이곳이 좋았는데 싶단다. 그 좋았구나의 느낌도 나가보니 알게 된 거니 그걸 알게 된 것만도 나쁘지 않다 했다. 계속 있었으면 좋은 감정도 못 느끼고 불만과 원망만 쌓여가지 않았겠냐 했더니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라고 씩 웃는 상철이 귀엽게만 느껴진다. 그 모습을 보니 예전에 우리가 마시던 맥주에 위로를 받은 게 아니라 서로의 미소에 위안과 안도를 느꼈던 건 아닌가 싶은 게 상철의 미소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2차로 판교 테크노밸리 빌딩 숲의 중간에 위치한 루프탑 라운지로 자리를 옮겼다. 한낮의 열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종종 선선한 바람이 피부에 닿는 느낌이 적당히 좋은 술 마시기 딱 좋은 밤이다.
우리는 테라스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주문하려는데 테이블 중간에 작은 무드등이 있길래 나도 모르게 그 등을 들고 종업원을 불렀다. 그랬더니 양옆에서 너 뭐 하는 짓이냐며 여기 벨 있는데 옛날 습관 못 버리고 자동반사적으로 등을 든 거냐. 예전에 나이트 좀 다녔냐며 놀리기 시작했다. 나도 들면서 이건 아니지 싶었는데 이미 들어버린 손은 엎어진 물이었다. 덕분에 조금 무거운 분위기는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 나 얼마 전 수경이를 봤어.
갑자기 조용하던 상철이 말을 꺼냈다.
- 수경이가 누군데?
생전 처음 듣는 이름에 나와 영수는 서로를 바라보며 동그래진 눈으로 서로에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 내 첫사랑.
- 오, 첫사랑 이야기 흥미진진한데. 계속해봐. 어디서 첫사랑을 만난 거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단어의 등장에 나와 영수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상철을 부추겼다.
- 종로 5가 지하철역 플랫폼에서 마주쳤어.
- 거기서 어쩌다가?
- 외근 나갔다 들어가는 길이었는데 누군가 걸어오는데 멀리서부터 알겠더라고. 그녀인걸. 나도 모르게 굳어버렸어. 정말 가야 할지 서야 할지 뒤로 돌아가야 할지 아무 생각도 안 들더라고. 수경인 10년 전 그대로였어. 깔끔한 커트 머리에 청바지 차림. 그 누나는 예전에도 그렇게 청바지만 입더니 여전하더라고.
- 누나? 첫사랑이 누나였어? 의외네. 누나를 만났을 줄이야.
- 응. 누나였어. 10살 연상.
- 헐, 10살? 거의 이모뻘인데. 어떻게 만난 거야?
- 20살 때 대학도 안 가고 돈이나 벌어 보겠다고 용인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잠깐 일했었는데 거기 작업 반장이었어. 그 누나가 어느 날 나보고 계속 공장만 다니지 말고 뭐라도 배워보라며 컴퓨터 학원을 알아봐 줬어. 거기 다니라고. 미안했지만 부모님 도움을 받을 처지도 아니었기에 염치없지만 누나의 도움을 받았지. 그러다 보니 자연히 연인이 되었던 것 같아.
- 그런데 왜 헤어졌어?
- 그렇게 2년을 만나다가 나는 대학에 들어가게 됐고, 어느 날부턴가 수경이가 연락을 잘 받지 않더라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멀어졌어. 그 누나가 날 놓아준 거지.
- 삼류 영화에 나올 법한 스토리구만. 그래서 그날 아는 척을 했어?
- 아니, 서로 미소만 짓고 스쳐 지나갔어. 그런데 자꾸 수경이가 생각나.
- 난리 났네. 난리 났어. 네 와이프가 알면 어쩌려고 그러냐. 잊어라.
-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게 아니야. 그날 이후 자꾸 과거의 내가 떠올라서 괴로운 거야.
- 난 설레는 마음이 어떤 건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첫사랑에 설레는 네가 부럽다.
나는 정말 추억여행을 떠난 듯한 상철이 부러웠다. 그렇게 나와 영수는 상철을 놀리다가 헤어졌다. 여름밤의 농밀한 공기와 첫사랑 이야기는 어딘지 맞닿아 있는 느낌이다. 나는 만나보지도 못한 상철의 첫사랑을 상상하며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