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생명력에서 배운 것들
봄이 왔다.
집 앞 공원에 핀 산수유와 매화꽃이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봄의 시작을 알린다.
추운 겨울의 바람을 묵묵히 이겨내고 새싹이 트기 시작한다.
꽃은 이렇듯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 저마다의 사연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작년 가을, 우리 가족은 가평 자라섬에 가을꽃 축제를 간 적이 있다
꽃들이 바다처럼 대지 위에 펼쳐져 있고 바람이 불 때마다 파도가 넘실 거리듯 장관이다.
가을꽃은 생김새와 향기도 마치 가을 햇살처럼 따뜻한 색을 품고 있다.
그렇게 나는 가을꽃의 아름다움에 취했는지
옆에서 잘 걷고 있는 남편에게 내가 대뜸 물어본다.
“나는 무슨 꽃 같아?”
남편은 오늘도 하나의 시험문제에 직면한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음…. 너는 핑크 뮬리 같아 “
나는 기분이 좋았다 “핑크뮬리 그거 괜찮네 …. 핑크색이고 예쁘니깐”
“그런 것도 있지만 , 핑크뮬리가 바람에 엄청 휘청거리지만 꺾이지는 않잖아”
나는 나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그의 말에 이내 수긍했다.
남편은 “휴 다행이다…. 오늘도 하나 잘 넘겼다” 하는 표정이다.
사람은 이렇듯,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는 꽃과 같을 때가 있다.
그럼 우리 아이는 무슨 꽃일까?
우리 아이를 떠올려보면 생명력이 강한 꽃,
차갑고 단단한 겨울의 대지 위해 얼음사이를 뚫고
자라는, 혹독한 겨울의 눈보라 속에서 기어코 새싹을 틔워내는 작은 얼음꽃일 것이다.
아이가 처음 태어나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신생아 중환자 실에서 전화 한 통이 왔다.
인큐베이터에 있는 아이에게 심정지가 왔고
CPR을 15분가량 했다고 했다.
뇌손상의 가능성이 아주 많았기에 저체온 요법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저체온 요법? 처음 듣는 단어였다.
부랴부랴 휴대폰으로 검색을 한다.
저체온 요법은
신체의 온도를 33.5도 이하로 떨어뜨린 후,
체온이 낮아지면, 신경계 기능이 느려져
뇌손상의 감소를 유도하는 치료법이라 하였다.
그렇게 갓 태어난 아이는
부모의 따뜻한 품에 있어보지도 못하고 ,
차가운 냉각패드 위에서,
이불 한 장 덮지 못한 채
72시간을 온전히 혼자 버텨내야만 했다.
너무 춥고 고통스럽기에 의료진은 아이를 재우는
약을 쓴다고 했다.
그렇게 신생아 중환자실로 면회를 갔었을 때의 아이의 모습은 말 그대로 처참했다.
여러 의료용 줄로 그 작디작은 몸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차가운 냉각패드 위에 누워 있는 아이는 마치 고통스러운 형벌을 받는 듯해 보였다.
당장이라도 모든 줄들을 떼어내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내 품에 따뜻이 품고 싶었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애타게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72시간 동안 나 역시 냉각패드 위에서 자는 듯한 추위를 느꼈고 , 그 72시간은 왜 이리 느리게만 흘러가는지 참으로 괴로웠다.
그렇게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괴로운 시간을 모두 홀로 버틴 아이는 우리에게 돌아왔다.
많은 꽃들은 대부분 따뜻한 봄에 꽃봉오리를 피우지만 ,
우리 아이는 차가운 눈 속에서
꽃을 피운 한송이의
작고 외로운 야생화였다.
“복수초 ”라는 꽃은 세찬 비바람이 부는 겨울에 매서운 추위를 뚫고 피어난다고 한다.
꽃이 필 때는, 눈이 채 녹지 않은 상태에서 피어나기에 하얀 눈과 대비를 이룬다.
우리 아이를 꽃에 비하자면 아마 이 작지만 강한 꽃일 것이다.
이 꽃은 어떻게 얼음 위에서 꽃을 피울 수 있었을까?
복수초는 제 몸에서 열을 발산시켜 주위의 눈을 녹이고 꽃을 피운다고 한다. 정말이지 기적처럼 감격할 만한 꽃이 아닐지 싶다.
아이 몸속의 작은 불씨 같은 강인한 생명력이 뿌리를 내리고, 그 혹독한 시간들을
외로이 버텨, 마침내 꽃으로 피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 아이는 이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의 온기로 나의 차가운 몸을 따뜻이 녹여준다. 그리고 자신을 안타깝게 그저 바라봐 준 나의 마음까지 위로해 준다.
아이는 생명이 얼마나 강하고 질긴 것인지,
그러기에 얼마나 가치 있고 고귀한 것인지,
죽으려고 하는 나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삶이 괴로워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면
아이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질기게 때론 처절하게 버텨온 시간들을 대뇌 인다.
그러면 금세 죽으려고 했던 마음이 반성이 되곤 한다.
그렇게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피어난 그 작은 아기 꽃이 우리에게 왔을 때, 우리 부부는 하루하루 매시간마다, 하다못해 분단위로 , 아이에게 사랑이라는 물을 주어가며 애지중지 키워 왔다.
활짝 핀 벚꽃아래서 봄을 즐기는 사람들처럼 ,
우리 가족이 함께하지 못한 모든 시간들을 보상이라도 받듯 , 마음껏 아이와 함께하는 일상을 즐기기 위해 애썼다.
아픈 아이가 알려준 것은,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는 각기 다른 종류의 꽃이라는 것이다.
꽃의 생김새와 향기 색깔이 모두 다르지만,
우리 모두는 꽃을 볼 때
환한 얼굴로 대해준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라도, 꽃은 어쨌든 꽃이기에 우리는 자신을 예쁘고 고귀하게 바라봐 주어야 한다.
우리는 하루 중 얼마나 꽃 같은 자신의 얼굴을 보며 예뻐해 주었는가?
꽃을 그냥 구석에만 두고 나 몰라라 하진 않았는가?
꽃은 그냥 꽃 자체로 아름다운 것인데 , 나는 인생에 왜 이리 많은 의의를 두고 괴로워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곳에, 그 자리에 있기만 해도
아름다운 게 꽃이고 , 사람이라는 걸
아이를 보면서 느꼈다.
아이는 우리의 품에서 그저 웃기만 해도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며 제 할 일을 톡톡히 한다.
마치 꽃들이 아무런 말없이 그냥 거기에서 피었다 지었다를 반복하며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 역시 시련이 있는 있는 인생의 한가운데서,
꽃들처럼 묵묵히 그리고 꿋꿋하게 아름다운 생명을 지키며 그 자리에 피어 있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