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넘어 산을 넘다.
아이가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온 첫날밤부터
우리는 혼돈의 카오스를 맛본다.
아이는 새벽 1시부터 몸에 빳빳이 힘을 주고 미친 듯이 울기 시작한다. 그렇게 다음날 아침 9시가 되어 지쳐잠든다.
뇌가 손상된 아이는 마비가 되어 굳은 몸이 아픈지 하루 반나절을 자지러질 듯 울다시피 했다.
아이의 두 다리는 나무 막대기처럼 딴딴했고 , 그걸 버티는 아이도 너무 고통스러웠기에, 수면제를 한통,
어쩔 땐 2통을 써가며 아이를 억지로 재워야 하는 날도 있었다.
병원에서 주는 어떤 약도 통하지가 않았다.
우리 부부는 한동안
간호사처럼 살아야만 했다.
3교대도 아닌 2교대를 하며 그 시간들을 버텨야만 했다. 남편은 하루 한 시간만 자고 일을 하러 가야 할 때도 있었다.
사람이 밤에 잠을 자지 못하는 일이 이렇게나 괴로운 일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새벽 3 ,4시 ….. 모두가 잠든 고요한 시간,
우리 부부는 우는 아이를 앉은 채
무릎을 꿇고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우리의 힘으론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산 앞에서 좌절하고 말았다.
남편과 나는 무릎을 꿇었다.
울며 부르짖으며 기도했다.
”지금 이 시간에 , 하느님 당신께 이렇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다? 제발 저희를 외면하지 말아 주세요. “
북받치는 감정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 그렇게 무슨 말인지 이해도 되지 않는 외계어를 해가며 울며 매달렸다. 매달릴 곳이 오롯이 신 밖에 없었다.
아이가 돌이 되면 통잠을 잘 줄 알았지만, 우리 아이는 4살이 다 되어서야 밤에 잠을 자기 시작했다. 밤낮이 바뀐 생활을 거진 4년 동안 한 것이다
장애 아이를 키우면서
산과 같은 어려움을 넘어야 할 때가 많다.
굽이굽이 첩첩산중을 넘어야만 한다.
아이를 안고 짙게 깔린 안개를 뚫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는 어떤 산을 올랐는가?
생각해 보면 … 위루관이라는 수술을 결정해야 했을 때였다.
아이는 음식을 넘기는 뇌의 기능이 손상 되었기에
입에서 식도까지 줄을 넣어 그 줄을 통해 우유를 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줄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아이한테는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신생아 중환자실 교수는 우리에게 위루관이라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위루관 수술? 또 처음 듣는 단어가 나왔다.
위루관 수술은 삼킴 곤란 장애가 있는 환자가 배에 구멍을 뚫어 뱃줄로 영양을 공급하는 것이라 한다.
“배에 구멍을 뚫는다고요? ”
처음 들었을 땐 상상만으로도 거부감이 들고 못할 짓이었다.
일주일 내내 고민만 하고 결정을 못하고 있을 때,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나오는 전미도 같은 여 교수님이 우리에게 정중히 말했다.
“준이는 입으로 먹지 못할 가능성이 90프로 이상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나 수술을 하는 것이 준이를 위해서 라도 좋습니다. ”
그 교수의 한마디에 나는 이내 수긍하고 수술을 받아들인다.
아이가 5킬로가 되었을 때 우리는 작고 귀한 아이를 수술대에 올려야만 했다.
그렇게, 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는 그 후로도 삼일간 통증이 있는지 몸을 심하게 떨면서 시름시름 앓아야 했다.
진통제를 써도 많이 아파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말도 못 하는 아기가 통증이 심하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는걸 두 눈으로 보고 온날엔 나 역시 꼬빡 밤을 새워가며 걱정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많이 미안한 일이지만, 걱정이 너무 심해 새벽에도 몇 차례 미친 여자처럼 “우리 준이 괜찮아요?” 하면서 간호사 선생님들을 번거롭게 만드는 전화도 여러 번 했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또 하나의 산은
경련, 경기였다.
아이는 태어난 지 6개월쯤 되었을 때 영아연축이라는 경기를 하게 된다.
아이는 경기를 한번 하면 뇌에서 스파크가 튀기에 , 머리가 많이 아프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자신도 모르게 뇌에서 불꽃이 번쩍 튀니 놀란 아이는 이내 울고 만다.
영아연축이라는 경기를 잡기 위해 소론도, 고용량 스테로이드 약을 먹어야 했다.
부작용으로 얼굴이 빵처럼 부풀러 오르고, 힘은 주체할 수 없이 세져 , 아이를 케어할 때 나는 아이의 몸부림을 온전히 안고 감내해야 했다.
이렇게 나는 아이를 낳고 무수히도 많은 산 같은 장애물을 넘어야 했다. 자진해서도, 누가 시켜서도 아닌, 그저 인생길을 걷다 내 앞에 산이 있었고 , 넘지 않으면 죽음뿐 답이 없었다.
무수히 많은 산을 넘고, 뒤를 돌아보니 굽이굽이 참으로 험난했던 산들을 넘어왔구나 싶다.
하지만
살기 위해 뛰었던 지난날의 경험들은
어려움과 맞서 싸울 인생의 체력을 키워줬다.
처음부터 에베레스트와 같은 산을 넘었기에 , 이제는 집 앞의 동산 같은 어려움은 쉽게 잘 오르락내리락한다.
예를 들어 아이 위루관이 빠져, 새벽에 고속도로를 질주해 서울 응급실까지 달려 간일,
아이가 토라도 한 번 하면 토가 기도로 넘어가, 폐렴에 걸리기라도 하면, 이젠 호들갑을 떨지 않고 침착히 지금 해야 하는 일들에 집중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요즘은 앞으로 넘어야 할 산들이
눈앞에 보이곤 한다.
걷지 못하는 아이는 지금 오른쪽 고관절이 빠져있다고 한다. 아마 일 년 이내로 고관절에 못을 박는 고관절 탈구 수술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앞으로 오를 무수히 많은 산들이 발 앞에 놓여 있지만, 그래서 솔직히 두렵기도 하지만,
나는 우리 부부가 울며 부르짖으며 넘어온 산을 기억하기에, 앞으로의 무수히 많은 산 또한 잘 넘어갈 것이라는 담대함이 생겼다.
산은 오르면 오를수록 더 큰 경치를 보게 된다.
산아래서는 보지 못했을 모든 것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넓어지고 남을 이해하는 이해심이 높아진다.
나 역시 인생의 산을 오르면서 더 큰 세상을 보게 됨에 감사함을 느낄 때가 많다.
이젠 더 이상 가녀린 여자가 아닌,
제법 억척스러워진 등산가가 된
나 자신이 대견스러울 때가 있다.
등산은 죽도록 싫어하는 내가 , 앞으로의 인생길 앞에 놓인 산들을 묵묵히 그리고 담대하게 넘어갈 수 있는 체력을 가지게 되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것이 우리 부부가 울며 매달렸던 신의 응답인 것 같아 감사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