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연 Apr 19. 2024

아름다운 추락

시련을 감사히 여기다.


아이를 가졌을 때 나는 산후 조리원을 3주 예약했다.

가격이 비싸도 10달 고생한 나를 위한 선물을 주고 싶었다.

막상아이를 낳고 나는 그 선물을 받을 수 없었다

아이는 중환자실에 누워있는데 나 자신을 호강시키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형벌을 주고 싶었다

남들은 사랑스러운 아기를 품에 안고 조리원에 올 텐데 나만 혼자 덩그러니 있는 것도 싫었다

그렇게 나는 조리원을 들어가지 못하고 집에서 혼자 산후조리를 했다.

아무도 도와주는이 없이 시큰시큰 아픈 손목을 부여잡고 미역국을 끓여 먹었다.

식은땀, 오한, 산후 우울증으로 밤을 꼴딱 새우기 일쑤였고, 이렇게 아이를 낳고 사람이 한순간에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하루아침 만에 추락하고 말았다.



아이는 지방 대학병원에 있다 경기가 잡히지 않아 서울 대학병원으로 전원을 갔다.

우리 집은 지방이었기에 서울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아이를 보러 다니기 위해서는 서울에 거처가 필요했다.

서울에 지낼 곳이 없었던 우리는 처음엔 모텔에서 지내면서 아이를 면회하러 다녔다.

그러다 중증 아이들의 커뮤니티 카페에 내가 지낼 곳이 없다고 글을 올리자 그곳의 엄마들이 내가 지낼 수 있는 곳을 소개해 주었다.

소개받은 곳은 한 재단에서 운영하는 “희귀 난치쉼터”였고 우리는 감사히도 무료로 그곳에서 두 달을 머물게 된다.



신촌에 위치한 쉼터는 작은 원룸에, 침대 하나 옷장 하나 있는 아담하고 따뜻한 곳이었다.

서울에 있는 우리의 전쟁 임시 거처지,

사람 두 명 들어가면 꽉 차는

작지만 소중한 우리의 초소,

그 작은 방에서 나는 전쟁 후유증과도 같은 산후통과 오한을 버티며, 잠시 후퇴해 있다 잠시 후 아이를 지키기 위해 다시 전쟁터로 나가야만 하는 전사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거쳐가 없던 우리를 따뜻이 대해준 아주 고마운 장소이지만, 그곳에서의 두 달을 생각해 보면 아직도 추운 겨울의 칼바람, 두려움, 불안, 눈물과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추운 겨울 회색빛 도심,

아무도 서로에게 관심 없는 차가운 사람들을 틈으로, 나와 남편은 매일 아침 언덕을 지나

53번 마을버스를 타고 칼바람을 맞으며,

회복되지 않은 몸을 질질 끌고 면회를 다녔다.

아직 아물지 않은 뼈마디 틈으로

차가운 바람이 칼처럼 파고 드니, 나는 가다가 주저 앉고를 반복한다.



그렇게 아이를 30분 보고 우리 부부는 갈 곳이 없없다.그렇게 찾아간 병원 카페,

남편은 무덤덤한지, 아님 아이의 아픔을 잊기 위해서 인지, 그 어느 때보다 일에 집중하며 노트북 앞에 하루종일 앉아 있는다.

나는 그 옆에서 아이의 질병을 공부하고 정보를 모으다 ,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내가 감당할수 있을까? 라는 두려움에 이내 엎드려 엉엉 울고만다.

그렇게 오후 5시까지 기다렸다 다시 병원으로 들어가 아이를 30분 보고, 저녁이 되어 차가운 바람을 뚫고 쉼터로 돌아가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방이 작아 짐을 늘리면 안 되었기에,

피난민 살이처럼 길가에서 아무 옷이나 한벌 사서 그 옷으로 몇 달을 버텼다.

서울에 있으니 병원 면회 끝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주변도 구경하라는 말은 들어오질 않았다.

오롯이 아이 하나 바라보며 지낸 두 달이었다.


나는 결혼을 하고 꾀 만족스러운 신혼 생활 4년 정도 즐기고 있었고 , 세상이 눈이 부시게 반짝거리며 아름다워 보였다.

핑크색 탄산소다 처럼 달콤하고 시원하고 때론 톡 쏘는 세상을 나의 아이도 즐겼으면 하는 바람으로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밑바닥을 경험하였다. 하루아침에 빌딩 꼭대기에서 바닥으로 추락한 기분이었다.

아이는 핑크빛 세상을 즐기기는커녕 ,

엄마 아빠 얼굴도 제대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히 아팠다.

나 역시 아이를 낳고 희귀 난치 쉼터에서 산후조리를 하게 될 것이라곤 있을 상상하지 못했었다.

나에게도 아이를 낳고 꿈이 있었는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이 치료실을 매일같이 데려다주는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악몽을 꾸는 듯했다. 이게 현실인가? 꿈인가? 분간이 되지 않는 하루하루였다.



“시련을 감사히 여겨야 해요”

어떤 이가 이런 나를 보며 한말을 듣고 나는 한참을 어이없어했다.

말의 이면의 뜻은 알겠으나, 아이가 장애인이 된걸 어떻게 감사하란 말인가?!!

이게 말이야 방귀야, 내가 죽으면 죽었지, 굳이 이런 시련을 발판으로 성장하라는 것인가?


사람들은 성장 앞엔 큰 좌절을 한번 겪는다고 하지만, 나는 그 많은 좌절 중 굳이 아이가 장애인이 되는 좌절을 발판으로 성장하고 싶지 않았다.

인생을 살면서 모든 사람이 한두 번의 좌절을 경험하지만, 아이의 장애를 디딤돌로 무엇을 어찌한단 말인가?

그저 장애를 안고 평생을 버텨야 하는 일이기에 ,

시련을 감사히 여기라는 말을 듣고,

나는 솔직히 너무 화가 났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시련을 감사히 여기라는 말의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왔다.


추락했기에 바닥에서 다시 출발할 새로운 기회 같은 게 생기기 시작했다.

새로 출발할 때는 그전에는 미처 가보지 못한 길을 가게 되었다. 한 번도 가지 못한 새로운 길을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아이 치료실을 다니며, 그곳에서 같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꿋꿋이 살고 있는 엄마들을 보았고, 눈물이 모이는 곳을 돌보아가며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으며, 그곳의 사람들을 통해 그동안 편안하고 안락하게 나만을 위해 살아온 시간들을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 순간 나의 아이 보다 더 아픈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그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부모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나에게 없는 사소한 것에 목을 매고,
불안해하던 태도 역시 없어졌다.

이미 충분히 행복했음에도

이 평화로운 시간이 언제까지일까

불안해하면서 지낸 시간들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숨을 쉬는 들숨과 날숨마저 감사히 여기는 순간이 왔다. 숨을 마시고 들이쉬는 것이 이리도 달콤했었나,

아무 일 없이 평화로울 때도 느끼지 못했던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밤에 잠들기 전, 아이와 아빠와 내가 침대에 누워

하찮고 유치한 이야기를하는 시간이 우리에겐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되었다.


삶을 살아가는 데는 꼭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구나, 그저 우리 세 가족 이렇게 서로 안고 보듬어 주는 시간만허락되어도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아이가 아프고
바깥활동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부터 독서가 나의 새로운 취미가 되었다.

일 년에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던 내겐 큰 변화였다.

나에게 주어진 이 시련을 이겨낼 방법들을 공부하였고, 꼭대기에서 추락하여 널브러진 나의 영혼이 어떻게 하면 덜 추해질까를 사색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보석 같은 한 문장만 발견하면 나는 왠지 모를 희열과 감동을 느꼈다.

인생을 살면서 이런 시간이 지금 나에게 주어짐에 감사함을 느낀다.



꽃잎은 떨어져 추락하는 순간도 아름답다.

선들선들 바람을 타고 반짝이듯 눈이 부시게 떨어진다. 나는 늘 벚꽃이 화려하게 피어있는 것만이 아름답다 생각했다. 요즘은 바닥에 떨어진 벚꽃 잎이 이리도 아름다웠나 새삼 느끼게 된다.

떨어진 꽃잎이 아름다워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며 보고 있자면, 추락한 나 자신이 떠올라 마음이 일렁인다.

꽃잎은 떨어지고도 그 자리에 기적처럼 생명을 품고 새싹을 남긴다.


정말 아름다운 추락이다.

우리의 추락도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