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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연 Apr 12. 2024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어

아픈 아이를 키우며 현타가 올 때


아이를 치료실에 데려다주는 길,
문뜩 “죽으면 편안해 질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픈 아이를 키우며 항상 밝게 웃는 나를 보며, 사람들은 “대단하다 , 존경스럽다”라고 말해준다.

그런 칭찬이 참 고맙지만 , 나는 실제 그런 칭찬을 받을 만한 좋은 사람이 아니라  떳떳하지 못할 때가 있다.

아이가 아픈지도 어느덧 6년 , 이젠 많이 괜찮아 졌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주기별로 3개월에 한 번씩은 무너지는 느낌이 든다.

계기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 아이는 입을 마음대로 벌리지 못한다.

아~ 하고 입을 벌리지 못하기 때문에 , 매번 칫솔로 이빨을 닦을 땐 애를 먹고 진땀을 뺀다.

실리콘 특수 스틱으로 한쪽 이빨을 꿰어 놓고 , 왼쪽 오른쪽 이빨을 번갈아가며 후다닥 닦는다

양치를 한 후 물로 헹구는 일 역시 쉽지 않다. 손가락을 거즈로 감싼 뒤 물을 살짝 묻혀 아이의 이빨을 헹구어준다. 안쪽 어금니까지 구석구석 닦아준다

그러다 아이가 내 손가락을 깨문다.

“아!!!!! ”

내가 소리를 지르자 긴장한 아이는 몸에 힘을 주고 이를 더 세게 물고 벌리려 하지 않는다.

손가락을 빼려고 하면 할수록 더 세게 물뿐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손가락이 잘려 나가는 느낌이다.

자라에게 물리면 손가락이 잘린다는데 딱 그 느낌일듯싶다.

아이의 이빨 틈새로 억지로 손가락을 빼낸다.

손가락을 빼고 난 후 너덜너덜 해진 듯한 손가락을 확인한다. 아이의 이빨자국으로 살이 패여있다.

아픈 손자락을 부여잡고 있으면 , 조금 뒤 현타가 밀려온다.



자기 자식에게 깨물려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복잡한감정을 이해하기 힘들 수  있겠다.


애지중지 키워온 호랑이 새끼에게 물린 기분이랄까?

그렇다고 아이가 일부러 물은 게 아니기에 아이를 미워할 수도 없다. 그 누구도 탓할 수도 없는 상황 앞에 벙찌고 만다.


아픈 아이를 키우며 현타가 한번 오면
나는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내면의 힘을 잃고 쓰러지고 만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나의 이중적인 민낯과 마주하곤 한다.

나는 이제는 많은 산을 올랐고 인생 체력이 강해졌다 하지만 가끔 힘에 부친다.

나는 이 정도면 잘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떨 땐 사는게 이게 맞나?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아이가 살아서 돌아와 준 것만으로 감사하다 여기지만, 우리 아이만 아픈게 억울할때도 있다.

나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지만 피해 주는 것 같아 망설인다.

나는 사랑받고 싶지만 어쩔 땐 그냥 혼자이고 싶다.

나는 괜찮다 하지만 정말 괜찮은가?



나는 초인간적인 사랑과 행복을 느낄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인간이기에
불완전한 감정과 마주하곤 한다.


아픈 아이와 살기 남기 위한 끓임 없는 자기 암시로 나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을 초월하고 싶지만 , 정말 초월하진 못한 것이다.

지금의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억지로 긍정적인 생각을해가며 애써 아등바등 살려했을 뿐,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바뀌어지지 않는 상황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무력한 나 자신과 마주하곤 한다.


아이가 아프기에 더 잘살아야 한다는 강박도 있다. 아픈 아이의 가족도 행복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꼭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왜 증명하려 했을까?

왜 보란 듯이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을까?

텅 빈 객석, 그 누구도 나에게 관심이 없는데 굳이 연극무대 위에서 가면을 쓰고 행복한 척 연기했는가?


사람들에게  나의 이런 이중적인 모습을
들키기라도 할까 솔직히 두렵기도 했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더욱 숨으려 했고 더욱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내 얼굴에 묻어있는 슬픔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더 웃고 더 착하려 했고 더 씩씩하려고 할 때도 있었다.

그러다 공황장애가 왔고 , 나는 내 안의 나에게 정말 괜찮은지 질문하게 되었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억지로 꾸미지고 척하지도 않으려 한다. 힘을 빼고 길게 가려한다.

그래도 다른 사람이 놀라지 않게 남에겐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힘들면 “힘들다 ” 이야기하려 한다.

요즘 어떻게 지내요? ”라는 사람들의 말에

“그냥 죽지 못해 살아요~ 하하하 ”라고 솔직히 웃으며 말한다.

그럼 상대도 “그렇구나.. 에휴 ~ 힘든 게 당연하지” 라며 나의 등을 토닥여준다.


나는 올해 처음으로 벚꽃을 보러 멀리 나가지 않았다. 매년 벚꽃을 보러 유명하다는 관광지를 찾아 여의도, 강릉 , 충주 심지어 일본도 갔었지만 올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의 마음이 암흑인데 꽃 앞에 억지로 행복한 척 사진을 찍고 싶지가 않았다. 벚꽃 속에서 다른 사람은 웃고 행복해하는데 , 나만 혼자 웃지 못한 채 다른 세상에 뚝떨어진 사람이 된듯한 기분이 든다. 나 자신에게 솔직해 지기로 한 후 유명하다는 벚꽃 축제에 가지 않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감정을 억누르고 , 통제하고 , 채찍질을
하면 할수록 내면에 꽁꽁 숨어 지내던
슬픔과 우울은 언젠간 반드시 분출되고 만다.

감정에 감정이 더해져 압력이 더욱 세지고 , 그렇게 팽팽하게 부풀어진 감정은 남편의 아주 작은 실수로 인해 압력밥솥의 꼭지가 터지듯 분출되고 만다.

그렇게 나는 갑자기 설거지를 하다 접시를 깨트린 적도, 오렌지를 먹다 오렌지를 던진 적도 있다.

그렇게 무작정 집을 나와 갈 곳이 없어 차 안에서 몇 시간 자다 집으로 들어간 적도 있다.



감정이 분출되 터지면 걷잡을 수 없고 후유증이 심하다는 걸 나는 몸소 체험했다.

분출된 감정을 다시 주어 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옆에 있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그리고 나 자신에게 큰 상처와 트라우마를 주게 된다.


감정을 터트리는 일을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나는 몸관리를 하듯 감정을 관리해야만 했다.

지금의 감정을 인정해 주고 잠시 쉬었다 가도 된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도 괜찮다.  

억지로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이 감정을 인정해 주고 추스를 충분한 시간을 준다.

다시 일어나기 위해 체력과 정신력을 비축해 둔다.

 


이것이 인간이 그저 인간답게 사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마음속은 썩어 있는데 마치 삐에로 인형처럼 웃고 다닌 지난 시간들을 후회한다.

그렇게 스스로를 옥죄고, 슬픈 모습을 감추기 위해 애써 꾸민 지난 시간들은 나를 병들게 했다.

이제는 억지로 행복한 척, 센척하지 않고 , 그저 인간 다운 모습으로 삶을 살아가려 한다.  


그렇지만,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이 봄날을 그냥 흘려보내는 일은 아쉬운 일이다.

올해는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공원에서 나만의 시간을 가지며 몸과 마음의 여유를 되찾을 때까지 조용히 봄날을 즐기는 중이다.

나도 모를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힘들어하는 동안 봄은 밤사이 내가 가는 길목에 벚꽃으로 카펫을 깔아놨다.

그 꽃길을 걸어가며, 오늘 아침 치료실 가는길, 죽고 싶었던 마음을 다시 추스려 본다.

하루에도 몇번씩 뒤바꿔는 외딴 섬 날씨와 같은 나의 마음에도 곧 봄날이 오고 , 진정한 미소 또한 찾게 될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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