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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연 May 22. 2024

나는 나의 우울증이 고맙다

우울을 동력 삼아 삶을 살아가다.


작년 이맘때,
나는 나 스스로 영정 사진을 골랐다.


새하얀 수국과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어 남편에게 꼭 이걸로 내 영정사진으로 해달라고 이야기했었다.

나의 마지막 모습이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은데, 남편이 대충 잘 나온 턱살 나온 사진을 영정 사진으로 고를 까봐 노파심이 났던 것이다.  

그만큼 , 죽음이 늘 내 코앞에 있었고 나의 우울증은 내 안에서 활개를 치며 오만하게 날뛰었다.



죽고 싶어 몸이 뵈뵈 꼬이던 고통스러운 시간,

내 핏속에 곰팡이가 있는 듯 피가 썩어가는 느낌.

우울증이 찐득찐득하게 심장에 달라붙어있어 심장이 쩌릿쩌릿 , 들숨은 쉬지도 못한 채, 숨을 뱉기만 할 뿐이다.

우울증은 그렇게 나를 창살 없는 감옥에 가두었고, 나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죽기 위해선 몸을 움직여야 하는데 , 그 움직임, 죽을힘도 없었기에 불행 중 다행히도 나는 여지껏 죽기 위한 액션을 취하지 못했다.

죽을 수 있는 간편한 알약 하나 있다면 입에 한 움큼 털어놓고 꽥하고 힘든 인생살이 끝내고 싶었다.



그런 우울증이 어째서 나에게 고마운 존재란 말인가?

나는 본의 아이게 나의 우울증에 감사한다.

찐득찐득한 우울을 떼어내려 발버둥 치는 힘을 동력 삼아 삶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우울증을 이겨내려 안간힘을 쓰며 애쓴 지난 시간들은 헛되지 않았다.

불의 뜨거운 인고의 시간을 거쳐 만들어지는 달 항아리처럼,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고풍스러움과 은은한 빛깔을 품고 있는 사람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었던 시간이 되었다.


우울증과 죽음은 뗄 수 없는 사이이다.

죽어야 비로소 편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 가득하다.

죽음이 곧 나의 구원이자 진정한 해결책인 듯 착각하게 만든다.


결국 죽음만이 답이기에 모든 것이 의미 없다고 느껴질 테지만, 

나는 반대로 매일 누군가와 마지막 작별인사 하듯 하루를 살았다.

사람도 음식도 나무도 꽃도 심지어 햇살까지 생의 마지막 인사를 하듯 각별해진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커피 한잔, 이왕이면 그 향과 맛을 음미하며 찬찬히 마시게 되고, 이젠 못 볼 나무와 꽃이니 그들과 마지막 대화하듯 유심히 보게 되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 치료실 앞 나무가 바람에 잎사귀가 부딪치며 거세개 휘몰아치는 소리는 꼭 나에게 살아내라고 당부하는 듯한 느낌이다.

“이겨낼 수 없으면 사명이라 여기고, 수행을 하듯 공들여 이 돌덩이를 지고 담대히 앞으로 나아가라고 ” 하는 듯하다.

늦은 오후 아이의 낮잠시간,  금빛햇살이 커튼 사이로 우아하게 쏟아지는 늦은 오후의 평온한 시간 또한 사랑하게 되었다.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으면 느끼지 못할 신비로운 경험이다.



그리고 나는 우울증을 동력 삼아 글을 쓰기 시작한다.

한낮 청승의 힘, 울분의 힘으로 글을 쓰고 삶을 이어갔다.

들추고 싶지 않은 마음속 쾌쾌한 먼지 한 톨까지 모두 끄집어내었다.

감추고 싶은 나의  무능하고 형편없고 때론 찌질했던 과거를 억지로 끄집어내 종이 위 한 줄의 글이 되었다.

타닥타닥 빛소리와, 자판 두르리는 소리가 앙상블을 이루며 마음의 감정들을 쏟아 부으니,  묵은 감정들이 비에 씻겨 내려간다.

그렇게 글을 쓰면서 치유를 받았고, 이제는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는 시간이 기다려진다.



좋아하는 일이 생기니 삶을 이어기도 될 명분이 생겼다.

무엇을 해도 의미 없던 인생 노잼 시기를 겪었던 나에겐 뜻밖의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우울증이 조금 나았더니 글이 쓰여지지 않는다.

그동안 퍼부었던 모든 글들은 내 우울증이 동력이 되어 쓰여진 것이지, 글솜씨가 좋아서도 내가 대단한 사람이어서도 아니었다.

요즘은 문학시간에 배우던 글들을 다시금 읽어본다. 오직 시험문제를 풀기 위해 학습을 했던 글들이 지금은 전과 다르게 새롭게 느껴진다.

글을 통해 나의 슬픔들을 씻어냈으니, 이젠 내가 좋은 글을 써서 글에게 은혜를 갚을 시간이 된 것 같다.


마지막 작별 인사 하듯 사는 것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다.

가녀린 민들레 꽃을 만지 듯, 혹시 나의 말로 다치지는 않을까, 조심스럽게 그리고 애정을 품고 대하게 된다.

혹시 오늘이 그를 보는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기에, 말을 할 때의 단어 선택도, 대하는 태도도 진심을 다하려한다.



나는 나의 우울증이 고맙다.

죽지 않고, 눈을 질끈 감은채 웅크리고 버티다, 슬며시 눈을 떠서 주위를 둘러보니 신은 내 앞에 살며시 선물 봇다리를 내려놓고 가셨다.  


특별할 것도 잘난 것도 없는 보통의 나날,

크게 바뀐 것은 없는 아이를 치료실 데려다주는 일상이지만, 같은 하루를 살더라도 삶을 요리조리 뜯어보며, 꼭꼭 씹어 음미하면서 살아가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밤마다 항우울증제를 복용하고 있지만 , 우울증을 진단받은 지 6년 차가 되어가니, 이젠 낯설고 당혹스럽던 우울에 적응한 듯하다.  

그렇게 나는 이 우울감을 동력 삼아, 삶을 애정하고, 귀하게 여기는 우울증 생존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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