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정기검진 취소했어.
면회를 다녀온 후 열흘쯤 지났을까? 여느 날처럼 출근해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업무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아빠로부터의 전화가 왔다. 덜컥 겁부터 났다. 아빠로부터의 평생 최초의 전화가 '엄마가 쓰러졌다'였고 그 이후 아빠와의 통화는 모두 내가 드린 것이었다.
엄마의 입원하시고 혼자 계시는 아빠의 식사 문제가 못내 마음에 걸려 일주일에 1~2번 정도 밑반찬과 국을 해서 가져다 드리고 있었다. 아빠가 안 계시면 옆집 가게에 맡기고 오곤 했었는데 그때마저도 가져갔다, 안 가져갔다 전화 한번 없으셨던 아빠다.
04. 정기검진을 취소했다.
아빠는 도통 전화라는 걸 할 줄 모르는 분이셨다. 그런데 그런 아빠가 또 아침에 전화를 하신 거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전화를 움켜 들고 휴게실로 향했다. 엄마 정기검진 받으러 가야 하는데 지금 당장 병원까지 데려다줄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 아침 11시 예약이라고 하셨다. 미리 말씀이라도 하시지, 채근할 여유도 안되고 일단 회사에 외출 허가받고 전화드린다고 하고 끊었다.
의사의 퇴원만류를 거절하고 나온 이후 첫 정기검진일이었다. 정기검진을 해야 하는데 엄마의 이동이 쉽지 않았다. 아빠는 운전면허가 없으시고 대중교통도 쉽지 않았다. 동생이 오기로 했었는데 바쁘다고 택시 타고 가시라고 했단다. 그래서 예약시간을 코앞에 두고서야 나에게 전화를 하신 것이었다.
몇 년 전 그날, 우리가 아빠를 병원에 모시고 가서 치료를 받았던 그날의 사건 이후 엄마와 아빠는 의사 결정전에 무엇이든 아들에게 먼저 물어봐야만 한다는 강박증이 생기신 듯하다. 그 이후 매번 이런 식이셨다. 다행히 외출 허가는 바로 났고 아빠에게 전화를 드렸다. 10시까지 갈 테니까 병원 정문 앞으로 나오시라고 말씀을 드렸다.
"안 와도 돼. 검진 취소했어."
"네? 아니 왜요? 잠깐 기다리시라고 했잖아요. 모시러 간다고요."
"요양병원에서 의사가 똑같은 똑같은 약 처방해 준다고 안 가도 된다고 했다고 OO이가 취소했어."
"아니 아빠 약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정기검진이라면서요. 받아야지요. 검진을 해야 상태를 알죠."
모시러 오지 못하니 동생은 택시를 타고 가시라 했고, 아빠는 혹시나 싶어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그 사이 동생이 요양병원 측에 구급차 이용이 가능한지 문의했는데 거절을 당한 모양이었다. 대신 요양병원에서 대학병원 처방약과 똑같은 약을 처방할 수 있다고 해서 동생이 정기검진을 취소한 것이다.
화가 났다. 아빠도 엄마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기검진이다. 번거로움의 문제가 아니다. 엄마가 뇌출혈이 발병하고 퇴원한 이후에 처음 하는 검진이다. 뇌출혈과 뇌경색은 예후가 중요하다. 검진을 해봐야 예후를 알 텐데, 그걸 취소하다니 나도 모르게 소리가 높아졌다. 아빠가 어쩔 줄 몰라하셨다. 아빠를 채근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니 얼른 전화를 끊었다.
병원에 전화를 했다. 취소된 예약은 무를 수가 없다고 해서 재예약을 했다. 다행히 예약을 잡을 수 있었고 보름뒤였다. 예정보다 늦어졌지만 그렇다고 검진을 안 하는 것보다는 늦어도 검진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와 아빠한테 재예약했고 내가 모시러 갈 거니까 동생한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다. 덧붙여서 이거 취소하면 나 다시는 안 볼 생각 하시라 협박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번에도 엄마와 아빠는 동생의 의견을 따랐다. 번거롭게 이동하지 말고 약만 먹어라? 약이 아무리 좋아도 검사는 해봐야 하는 거 아니냔 말이다. 아들만 자식이냐고 딸도 자식이라는데, 부모님은 늘 모든 결정은 아들에게 맡긴 채, 딸은 돈만 주면 그만이다. 그 이상의 참견을 못하게 하신다.
지난 20여 년 엄마와 아빠의 입원과 퇴원 모두 내가 모시고 다녔었다. 바쁘다고 아들은 입. 퇴원에는 오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와 새삼스럽게 못 다닐 이유가 뭐란 말인지. 그날 이후 엄마와 아빠는 동생의 눈치를 너무 심하게 보신다.
아들이 난리부르스에 지랄발광이니 딸인 나는 잠자코 돈만 달라는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는 당신의 건강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아들의 선택을 따르기만 할 뿐이었다. 그 결정에 엄마와 아빠, 두 분의 의견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도 없었고. 우리 집 권력깡패만 있었다. 예전이라면 엄마와 아빠의 의견을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엄마는 뇌경색이고 검진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엄마와 아빠가 아들 눈치를 보든 말든, 나한테는 엄마의 검진이 더 중요하다.
잘못되었다고, 그릇된 행동이라고 해도 잔소리 한 번을 하지 못하고 마냥 따라만 가는 부모님을 부면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아들이 뭐라고 평생 아들 눈치를 보며 산단 말인지,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엄마의 생명이 걸린 일이다. 제발 딸에게 돈만 받지 말고 의견도 받아주시는 엄마와 아빠이기를 간절히 바랐건만,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시오패스' s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 무책임한 의사 결정을 한다.